블랙 아이스 /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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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스
김이듬
눈발은 눈이었을 때 아름답다
쌓인 눈이 눈석임물 되었다가 얼어붙으면 가장 위험하다
눈이 그쳤는지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본다
설원이 녹고 있다
도로와 개펄이 드러난다
항구 기능을 상실한 저 월곶 포구에는 아침 어시장이 열릴 것이다
아침, 눈, 엄마
에밀리가 좋아하는 단어들을 나도 좋아한다
엄마 빼고는 여기 다 있다
에밀리는 기지개 켜다 말고 베개를 껴안으며
말한다
"오늘은 찾을 수 있겠지?
나랑 닮았겠지?
죽진 않았겠지?"
이 친구는 포틀랜드에서 입양 기록 갖고
엄마 찾으러 한국에 왔다
어제는 에밀리가 내민 지번 주소 들고 그의 부모 댁을 찾아갔지만
삼미시장으로 변한 거리만 확인했을 뿐
우리는 40여 년 전의 시간을 찾을 수 없었다
난생처음 한국에 온 에밀리와 난생처음 시흥에 온 나는
을씨년스러운 시내를 온종일 돌아다녔다
폭설이 쏟아지기 시작한 건 마전저수지 사거리에서
에밀리가 양팔을 벌린 채 돌다가 웃다가 넘어진 건 해가 질 무렵
"히죽거리며 말하지 마, 에밀리!"
"그럼 울어야 되겠어?"
뜨거운 물에 빨아 널어 둔 장갑은 수축되어 작고
어제 입었던 스웨터는 여태 축축하다
작년에 룸메이트가 던진 말이 떠오른다
실수로 놓고 가는 줄 알고 챙겨 준 물건들이었다
버리기는 그렇고…… 너 가져
갖기 싫으면 버려 줘
사람 마음만큼 잘 변하는 게 있을까
희고 부드러운 눈발 같았다가 녹으면서 성질이 변한다
철이 들어 나의 엄마를 찾아갔을 때
엄마는 새엄마보다 낯선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면 원래 그런 사람이었을까
딸을 버리고도 그리움이나 죄책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차갑고 미끄러운 길이 펼쳐져 있다
"눈이 그쳐서 더 추울 거야
장갑도 껴
눈길보다 살얼음판이 더 위험해"
에밀리가 태어난 곳을 향해 간다
생후 8개월 동안 살았던 곳을 향해 춤을 추듯 걷는다
어딘지도 모르면서
모텔 주차장에서 나오던 검은 승용차가
반 바퀴 돌며 도로를 벗어난다
누구였는지 알 수 있을까
왜 그랬는지 물어봐서 뭐 할까
범인을 잡는 데 회의적인 소설 속 형사는 이해가 되지만
회의적인 가이드이자 친구로서의 나는 우리의 행방을 모르겠다
실제로 가긴 간다 미끄럽고 거무스레한 길로
태어나려면 거쳐야 하는 통로 같다
만나봐야 좋을 게 없을지라도
한 번 더 버려질지 모르지만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까마득히 모를 곳으로
―김이듬 시집, 『누구나 밤엔 명작을 쓰잖아요』 (타이피스트, 2024)
제2회 가히문학상 수상 시집
2001년 계간 《포에지》로 작품 활동 시작
시집으로 『별 모양의 얼룩』 『명랑하라 팜 파탈』 『말할 수 없는 애인』
『베를린, 달렘의 노래』 『히스테리아』 『표류하는 흑발』 『마르지 않은 티셔츠를 입고』
『투명한 것과 없는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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