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 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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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18회 작성일 16-04-12 09:43본문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변종태
관(管)
수돗물이 나오지 않는 아침,
맨 얼굴로 거울 앞에 서 있다.
간밤 쓰러진 남근(男根)은 일어설 줄 모르고,
영하로 내려간 수은주는 일어설 줄 모르고,
물이 내려가지 않는 좌변기 앞에서
꽉 막힌 생리현상을 견디고 있다.
변비도 아닌 것이, 이렇게 내 몸의 한 쪽을
수도관이 얼면서 내 몸도 함께 얼어가는 것일까.
입에서 항문까지 하나의 관으로 되어 있는 인간의 몸
그 중간이 막혀 하루를 시작하지 못하는,
눈을 퍼다가 물을 만드는 중이다.
불꽃으로 만드는 물,
서서히 녹다가 끓어오르는 생(生)을 꿈꾸는 아침.
여자를 연주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긴 키스를 해 보았다는 여자,
흡연 경력 30년, 능숙한 입술로
그녀의 입을 아무리 빨아도 시원스레 연기가 나오지 않는다.
마그리트의 그림도 그랬을까.
그림 속 파이프를 빨 수도 없지만,
아무리 빨아도 연기를 만들 수 없는 파이프.
그녀의 몸도 연기를 낼 수가 없다.
그녀의 입으로 들어간 내 입술이
그녀의 항문으로 나온다.
출구를 찾지 못하는 나의 고백, 나의 입술.
색소폰
허리띠 끝을 물고 색소폰 연주하는 시늉을 하던 그가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것이 아니라, 노래, 부른다.
마이크를 뜯어 먹을 듯이 노래, 부르던 그가
갑자기 눈물을 흘린다.
노래를 노래할 때에는 노래가 아니라서
그가 부르는 노래는 노래가 아니다.
노래를 부르던 그가 흘리는 눈물이 4분음표, 16분음표가 되어
노래방 구석구석을 적신다.
그의 입에서 눈에서 쏟아지는 음표들을 모아
다시 노래가 아닌 노래를 부른다.
훌륭한 가수입니다.
기계가 문득 그의 뒤통수를 쓰다듬는다.
마른장마
비, 가 내리지 않는 장마철을 견디는
화분에 심긴 화초들의 퀭한 표정을 본다.
하늘만 바라보다가 말라가는 생(生)이
어디 이들뿐이랴.
지하철 계단에 쪼그린 채 잠이 든
노숙 10년차 김 씨의 머리 위로
소낙비, 같은 파리 떼 웅웅
지하도 끝까지 이어진 그의 꿈속을 적시는
파리 떼의 비행, 말라가는 그의 생(生) 위로
비, 가 내린다.
축축한 지하도에 비가(悲歌) 내린다.
*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Ceci n’est pas une pipe) :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제목.
1963년 제주에서 출생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 『안티를 위하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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