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동우물 / 강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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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836회 작성일 16-05-24 14:38본문
청동우물
강문숙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그의 아내가 지나간다.
댕기머리 아들이 천자문을 끼고 지나간다.
헛기침하며 교자 탄 나으리 지나가고
농사꾼 방울장수 유기전의 사내들이 떠들며 지나간다.
쪽진 머리의 그의 아낙들 젖통을 흔들며 지나간 뒤
소와 말, 돼지와 홰를 치던 닭들이, 쥐새끼들이 지나갔으리.
천체박물관 전시실 안, 앙부일구仰釜日晷* 청동의 육중한 원을
따라 하염없이 감겼다가 풀리는 소리들이 있다. 웅웅거리며, 무
수한 결을 따라 돌다가 전시실을 가득 채운다. 그 소리는 푸르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란 때로, 소리가 되어 떠돌기도 하는 것인
지, 저 깊은 시간의 우물 속을 들여다보노라니 머리끝이 쭈뼛해
진다. 사소한 기억까지도 담고 있는 청동우물.
손바닥을 대어보니, 사라진 것들이 속속 돌아와 울음 섞인 노
래를 풀어놓는다. 자꾸 슬픔 쪽으로 기울어지며, 무중력의 그 속
으로 빨려 들어가던 나는 문득, 어디서 왔는지 한 점 서러운 꽃잎
이 떨어지는 걸 본다.
비와 바람과 햇빛들이 일렁이는 심연에서, 이윽고 아득하고도
맑은 종소리 울려나온다.
어느 사원인들 저토록 깊을 수 있을까.
*앙부일구 ㅡ 저잣거리에 두고 지나가는 사람마다 볼 수 있게 한, 세종 때 만든 해시계.
경북 안동 출생
1991년 대구 매일신문 신춘문예 당선
1993년 『작가세계』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잠그는 것들의 방향은?』 『탁자 위의 사막』
『따뜻한 종이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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