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뚜라미 다비식 / 함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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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881회 작성일 16-06-23 10:40본문
귀뚜라미 다비식
함기석
입이 탄다
눈이 타고 귀가 타고 심장이 탄다
화장은 몸이라는 미궁의 천체, 그 아름다운 지도를 태워
하늘로 재를 돌려보내는 기산(奇算)이다
불 속에서 귀뚜라미 울음이 한 채 한 채 타고 있다
그것은 우주 저편 먼 얼음의 별에서 울려오는
히페리온의 아픈 잠
다비의 담 뒤꼍에서 어린 귀뚜라미들 울고
말과 침묵 사이에서
나는 본다
죽은 귀뚜라미 얼굴에서
끝끝내 타지 않고 나를 보는 두 개의 검은 눈동자
거기에 거꾸로 착상되어 떠오르는
삼천대천세계를
전생과 내생 사이로 불길하게 흐르는 불
하늘과 대지 사이로 빗물에 섞여 흘러가는
죽은 자들의 피와 뼛가루
검은 납덩어리 같은 죽인 자들의 웃음소리
이 모든 것의 함수(f)와 역함수(f-1)의 가혹한 존재조건들
귀뚜라미 몸이 타고 있다
오늘도 역사책은 흙먼지 휘말리는 트로이 성벽에
찌그러진 투구와 함께 헥트로의 머리처럼 나뒹구는데
한 장의 마른 낙엽 위에서
죽은 귀뚜라미 덮은 11월의 하늘과 땅이 한 몸이 되어
창백한 백지처럼 불타고 있다
연기는 죽은 자들이 땅에 누워 하늘로 흘리는
기체의 눈물이자 원한의 흰 피
시간은 지상의 인간을 상수 C로 소거시키는 기이한 대수방정식
귀뚜라미 타는 몸에서 불붙은 새들이 날아오르고
검은 주판알들이 계속 튕겨나간다
입이 탄다
우리의 손발이 얼굴이 타고 몸통이 타고
재의 치마 속에서 금빛 실들이 나와 햇빛과 몸을 엮는다
누가 돌리는 걸까
저 아름답고 아픈 가을볕 속의 황금물레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 등단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공원』 『오렌지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
동화 『상상력 학교』
2006년 눈높이아동문학상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2013년 제8회 이형기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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