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 / 김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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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864회 작성일 16-07-21 09:26본문
모자
김나영
마음에 드는 모자 하나를 샀다
내 머리에 조금 큰 게 흠이지만
나를 커버하고 코디하기에 이만한 게 없다
머리를 감지 않은 날이나
화장 안 한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에도 그만인
모자는 패션의 완성이 아니다,
모자는 나의 방패다, 나의 무기다
어느 날 이 모자를 처음 쓰고 외출 했을 때
나를 아는 어떤 사람은 내 얼굴이 달라뵌다고도 하고
나인 줄 몰라봤다고도 하고
나를 다시 바라보게 됐다고도 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고 대답하면서도
내심 팥죽처럼 풋풋풋-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모자로 꾹 누르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모자의 위력 속으로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모자의 테두리가 세월과 함께 차츰 낡아가고
모자를 쓴 내 모습도 사람들 기억에 익숙해져 가고
모자와 내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되어가고 있을 무렵
어느 날 모자를 집에 벗어놓고 외출을 했을 때
모자를 안 쓴 내 모습을 사람들은 아무도 몰라봤다
이게 원래 내 모습이라고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내 말을 믿지 않는다
모자를 천천히 벗었다 썼다 벗었다 썼다 해도 사람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나는 모자를 마음에 쓰고 산다
어디에 내려놓지도 걸어 두지도 못하는 모자
나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하는 모자
요즈음엔 잠들 때도 벗지 못하는 모자
모자를 벗은 내가 나인지, 모자를 쓴 내가 나인지 나도 헷갈릴 때가 있다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속고 만다*
*김수영의,「성(性」에서 인용
1961년 경북 영천출생. 1998년《예술세계》로 등단.
2005년, 200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을 받음.
시집 『왼손의 쓸모』, 『수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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