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잉크로 쓴 분홍 문장 / 강미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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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911회 작성일 16-08-05 09:27본문
검은 잉크로 쓴 분홍 문장
강미정
부피를 가지지 않고도 묵직한 것들은 온다
해가 지고 저녁이 올 때,
병 깊은 여자가 옥상 난간에 앉아 석양을 바라볼 때
역광으로 빛나는 그 여자의 뒷모습을
옥상 계단을 오르던 남자가 멈추어 서서 지켜볼 때
둘 다 눈물 괸 눈빛일 때,
빛이 사라지면 윤곽이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당신이 사라지면 나는 나의 무엇이 사라지는가
가장 가까운 곳부터 모두 지우고 마지막 하나
검은 잉크로 쓴 분홍 문장을 당신이 보여줄 때
그 분홍 문장으로 반짝거렸던 내 말과
흥얼거리던 내 노래를 잃고 입술을 닫은 나에게도
뭔가를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이 오고
그걸 알아차렸을 때는 이미 시간이 다 지나가서
먼 곳이 지워지고 점점 가까운 곳도 지워져
검은 잉크로 썼던 분홍 문장에 엎질러진 먹물,
당신은 몇 겹의 무늬로 오는가
이 밤은 또 몇 겹의 무늬로 깊어지는가
지우고 싶지 않은 분홍 문장만 무한대로 열려
먹물을 먹인 붓을 들고 달빛이 분홍 문장을 탁본한다
경남 김해 출생
1994년 《시문학 》 등단
시집으로 『타오르는 생』 『물 속 마을 』
『그 사이에 대해서 생각할 때』『 상처가 스민다는 것』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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