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아래서 / 변종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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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86회 작성일 16-10-10 10:31본문
은행나무 아래서
변종태
기원전의 나를 해독하는 일은
오래 살아온 동굴의 벽화를 해독하는 일
지린내 풍기는 삶의 벽에 굵은 나무 하나 그려 넣고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
노오란 들판에서 짐승 한 마리 떠메고 돌아오는 일
심장 따뜻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며
붉은 웃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묻고
일회성 삶의 지린내를 맡으며 오늘밤의 포만으로
다시 기원후의 삶을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맨손으로 은행을 까는 일은
기원전 내 모습이 핏빛으로 물드는 일
퇴근길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를 지나다가
은행을 밟은 채 버스에 올라탔을 때의 난감함
벽화에 다시 핏빛 노을이 번질 때
등 떠밀려 사냥터로 나가는 가장의 뒷모습
지린 은행처럼 창밖에는 사냥감 한 마리 보이지 않고
기원전의 생을 기억하는 일은 다시
맨손으로 익은 은행을 주무르는 일
화석이 된 가장의 일과를 동굴 벽에 그려 넣으며
어제의 포만을 기억하는 가족들의 흐뭇한 얼굴을 추억하는 일
은행나무 아래를 조심스레 걸어서 만원버스를 타는 일
기원전 내 생의 벽화가 희미해가는 일
은행나무 아래서 기원후의 나를 추억하는 일
1963년 제주에서 출생
1990년부터 《다층》으로 작품활동 시작
시집으로 『멕시코 행 열차는 어디서 타지』
『니체와 함께 간 선술집에서』 『안티를 위하여』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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