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부린 책 / 송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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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76회 작성일 16-10-13 10:39본문
구부린 책
송종규
켜켜 햇빛이 차올라 저 나무는 완성되었을 것이다
꽃이 피는 순간을 고요히 지켜보던 어린 나방은 마침내 날개를 펴, 공중으로 날아
올랐을 것이다
바스러질 듯 하얗게 삭은 세월이 우체국을 세워 올렸을 것이다
숲과 별빛과 물풀들의 기억으로 악어는 헤엄쳐 나가고 행성은 궤도를 그리며 우주를
비행했을 것이다
천만 잔의 독배를 마시고 나서 저 책은 완성되었다
자, 이제 저 책을 펴자
잎사귀를 펼치듯 저 책을 펼치고 어깨를 구부리듯 저 책을 구기자
나무의 비린내와 꽃과 어린 나비가, 악어와 우체통이 꾸역꾸역 게워져 나오는 저 책
저 책을 심자
저녁의 우주가, 어두운 허공인 내게 환한 손을 가만히 넣어줄 때까지
1952년 경북 안동 출생
효성여대 약학과 졸업
1989 《 심상》으로 등단
시집 『그대에게 가는 길처럼 』『 정오를 기다리는 텅 빈 접시』
『 고요한 입술』『녹슨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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