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곡사를 가다 / 황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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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660회 작성일 17-01-09 09:23본문
연곡사를 가다
황시은
숲이 뒤척거리자 사내의 척추가 드러났다
밤사이 다녀간 그녀의 체액으로 흥건하다
아직도 컴컴한 구멍속이 궁금하다며 바람은 혀를 날름거린다
루주 바른 입술마다 균열이 심하다
나도 한때 저렇게 미친 듯이 누군가를 원했다
결국 포유류의 유즙만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을 뿐인데
살아있는 것들의 심장이 거울 대신 카메라를 원한다
연곡사는 해가 떠오를 때까지 불을 켜 두었다
귀여운 연못은 사춘기 소녀의 유방처럼 앙증맞다
소녀는 늙지 않았다
연잎 우산을 쓴 채 진흙 팩으로 온몸을 감싸고 누웠다
날이 흐려서 그림자가 밟히지 않아 다행이다
붉은 파편마다 내건 공기의 소리가 낯설다
숨이 막혀버릴 감정을 배우지 못한 학습법이 실수였다
사라지고 없는 소문이 새어나오지 못하도록
공기는 제 할일을 다하고 있는 것이다
척추에서 난도질되어 튀어나온 파편들은 구름을 이룬다
초록은 빨강이다
가위로 오려 만든 종이인형 같은 소녀는 만들어지고 있다
빠르게, 더 빠르게, 떨리고 있다
나는 지구의 회전을 믿지 않지만 여기 오게 된 약속은 하나였다
사내의 드러난 척추마다 혈선이 붉다, 풍성하다
빠르게, 더 빠르게 떨리고 있다
대적광전 비로자나불 서럽게 울고 계셨다는 나의 증언을 믿는 사람은 아직 없다
* 연곡사 : 전라남도 구례군 지리산에 자리한 대한불교조계종 사찰이며, 단풍이 유난히 맑고 붉은 곳이기도 하다.
- 시집 『예쁜 예감』중에서
경남 함안 출생
2007년《시선》등단
시집『난 봄이면 입덧을 한다』『예쁜 예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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