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주의자의 하루 / 김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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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812회 작성일 17-01-19 08:41본문
소심주의자의 하루
김명원
지하철에서 오랜만에 앉았는데
내앞에 서있는 저 여자는 나보다 나이가 들었을까,
백발에 주름에 자꾸 마음이 긁적여진다.
그녀가 든 짐 보따리는 태산이다.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짐을 들어줘야 하나
백번쯤 고민이 정차하고 승차하고 망설이는 사이
그녀는 하차한다.
역사를 빠져 나오는데
가을에 맞지 않는 지나친 외투 차림 노인이
금 간 썰물 바닥에 빈 조개 껍데기마냥 엎드려 구걸한다.
바구니엔 좌초한 동전 몇 닢, 먹다 헤진 삼립빵 조각,
아뿔싸, 지갑을 열자 천 원짜리가 없다.
만원에 새겨진 세종대왕이 오늘따라 왜 근엄한지
초록빛 수평선 화폭을 접었다 폈다 해풍에 출렁이다 결국
계단 절벽을 올라선다.
강의실에 도착했는데
교탁에 커피 한 잔 놓여있다.
노란 쪽지엔 날씨가 추워졌어요, 교수님, 힘내세요.
따뜻한 응원 한 잔이 김영란법에 저촉된다는 경고 기사로
쌀쌀한 차단벽 너머 팔을 오르내리는 사이
창밖으로 조락하는 포플러 잎을 바라보다가
커피를 가져다 놓은 범인을 찾아
유죄판결문을 낭독한다.
간신히 하루를 마치고 귀가,
청탁 시를 쓰는 밤, 컴퓨터를 마주하고
오늘의 구보 씨는 얼마나 소심했을까.
이렇게 얼마나 살아야 할까,
이런 이야기가 시가 될까,
주저리 깜빡이는 커서에서 황망히 방황하다가
뉘우치며 전원을 끈다.
1959년 충남 천안 출생
이화여대 약학과 및 성균관대 대학원 국문학과 졸업(문학박사)
1996년《시문학》등단
시집으로『슬픔이 익어, 투명한 핏줄이 보일 때까지』『달빛 손가락』
『사랑을 견디다』 등
노천명문학상, 성균문학상, 대전시인협회상 수상
현재 대전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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