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진내에 두고 온 나 / 김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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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80회 작성일 17-03-10 10:15본문
어진내에 두고 온 나
김해자
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서 있죠 나오다 안 나오다 끝내 끊긴 황달 든 월급봉투들 무짠지와 미역냉국으로 빈 배 채우고 있어요 얼어붙은
시래기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소녀가 살고 있네요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
배추밭에 배추나비 한가로이 노닐던 가정동 슬라브집 문간방에는 사흘 걸러 쥐어터지던 붉은 해당화가 울고
있어요 지금도 들리는 아이 울음소리 듣지 않으려 귀 막고 이불 속에 숨어 있다 저도 몰래 뛰쳐나가 패대기쳐진
여인과 아이와 한 덩어리 된 어린 여자 눈물방울이 아직도 흙바닥에 뒹굴고 있을까
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집 흙벽 아궁이가 있던 옛 부엌엔 전단지 속 휘갈긴 어린 해고자
메모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애호박 몇 조각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는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배기 그 작고 낮은 닭장집 창문마다 한밤중이면 하나둘 새어
나오는 쓸쓸하고 낮고 따스한 불빛
이상하기도 하죠 스무 해 전에 도망쳐 왔는데
아직도 내가 거기에 있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요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고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제자리에 선 뜀박질이었다니요
1961년 전라남도 신안 출생
고려대학교 국문학과 졸업
1998년 《내일을 여는 작가》 등단
시집 『무화과는 없다』 『축제』 『집에 가자』
민중 구술집 『당신을 사랑합니다』
산문집 『내가 만난 사람은 모두 다 이상했다』
1998년 전태일문학상 제10회 백석문학상 수상
제13회 이육사 시문학상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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