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 스톡홀름 3 / 곽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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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2,793회 작성일 17-04-07 11:40본문
호텔 스톡홀름 3
곽은영
1
버리고 가는 이와 담아가는 이
스톡홀름을 떠날 때는 그렇다
낚시꾼들은 절대 빈손으로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을 위해 예쁜 마크의 냅킨과 타월
쿠키와 차를 넉넉하게 가져다 놓았다
낚시꾼들의 방은 약간의 생선 비린내가 남지만 말끔하게 치울 수 있다
버리고 가는 이들은
어딘지 수척해 보였다 그들이 현관을 나설 때는
트렁크의 부피가 그다지 줄어든 것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빗 양말 쪽지 빵조각
심지어 사람도 버리고 간다
나는 그들을 위해 일부러 작은 쓰레기통을 둔다
버리고 싶은 것은 그냥 두고 떠나면 되도록
그들은 고통에서 깨끗하게 빠져나가고 싶기 때문에 무엇을 버린다
2
스톡홀름에 버려진 것 중 가장 크고
치우기 곤란한 것은
돌아갈 곳을 잃어버린 사람이다
버려진 사람은 여러 날의 숙박료를 미리 지불하고
그 자리에서 물러져 땅 속으로 스며들길 원하는 토마토처럼
방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도 그랬다
바짝 깎은 머리와 조금 퀭한 눈빛의 그는
하루 종일 TV를 보았다
식사를 가져다주며
스톡홀름은 사람을 버리는 곳이 아닙니다
말하고 싶었지만
더 필요한 게 있으세요 라고 말했다
그리고 괜찮다는 그에게
1층의 전화기를 쓰셔도 됩니다
친절하게 덧붙였다
3
가까운 곳에 바다와 울창한 숲이 있다
인정하기 싫지만 마음만 먹는다면
스톡홀름은 사람을 버리기에도 적당한 곳에 있다
잔인함은 먼 나라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버려진 사람은 침대에서 일어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침대에서 일어나 1층으로 내려와 전화를 걸면
모든 것이 해결되었다
삐걱 삐걱
나는 새삼 계단의 낡은 소리를 기다렸다
적어도 내 생각엔 그랬다
4
누구나 저마다의 이유가 있기 때문에 스톡홀름에 온다
불행히도 나는 호스트일 뿐
의사나 친구도 되어주지 못한다
5
나는 그가 스스로를 버리지 않기를 바랐다
이기적이게도
스톡홀름을 죽음의 출발지로 만들 수는 없었다
나는 3번의 식사시간 외에
차와 쿠키를 먹는 간식과 칩과 맥주를 먹는 오락을 생각해냈다
여행객들을 감시해서는 안 되지만
스톡홀름을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조금 놀란 빛이 확연했다
이런 서비스가 제공되는 줄 몰랐습니다
그가 짧으나마 여행객의 설레는 표정을 짓자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6
그와 나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카드를 펼쳤다
나는 하트의 퀸을 좋아한다
그는 솜씨있는 카드꾼이었다
내가 하트 퀸을 노리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그래서 번번히 졌다
그는 노련한 스페이드 잭이었다
가장 큰 패는 누구나 원하죠
그래서 실패하기도 쉽습니다
그는 짧게 말했다
문득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가 마지막 패를 열었다
스페이드 에이스
나는 한 번도 이기지 못했지만 그도 표정이 어두웠다
스페이드 에이스
아마도 그는 스스로 품은 칼에 찔렸을지도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닫아 주었다
한밤 중 하루의 쓰레기를 버리려고 뒤뜰에 나왔을 때
그의 방에는 불이 켜져 있었다
7
그가 지불한 만큼의 시간을 채우자 나는 불안해졌다
그의 계단소리를 듣기 위해 내 귀는 이미 뾰족해졌다
더 머무를 것인지 물어봐야 했다 스톡홀름의 규칙이니까
그러나 두려웠다
망설이던 아침 기다리던 발소리가 났다
그가 쥐고 있던 마지막 패가 떠올랐다
전화를 걸까 숙박료를 낼까
숙박료를 낸다에 하트 퀸을 걸겠어
그가 내 앞에 섰다
전화를 써도 될까요
나는 상냥하게 웃으며 수화기를 들어 건넸다
난 또 졌구나 피식
하루가 가기 전에 도어벨이 급하게 울리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슬쩍 눈을 마주치고 멋쩍지만 어쩔 수 없었던
그림자를 놔두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방을 치웠으나 무엇이 그를 일으켜 세웠는지 찾지 못했다
그가 버리고 간 것은 없었다
창을 열어 바람이 들어오도록 오래오래 놔두었다
가장 큰 패는 누구나 원한다
그래서 실패하기도 쉽다
하지만 여전히 가장 큰 패를 원한다
1975년 광주 출생
1997년 전남대와 2001년 서울예술대 문예창작학과 졸업
200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으로 『검은 고양이 흰 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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