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우개는 참 이성적이다. > 시인의 향기

지우개는 참 이성적이다.

노장로 최홍종

해도 해도 너무 경우가 심하다고

높이 꾸준히 외치며 한 판 말씨름하려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려는 찰나에

절대로 아니라고 고개를 설레설레 문지른다.

옷매무새에 신경을 쓰며 이성을 차리고 쳐다보니

다시 그곳에 머리가 한 솎음 바르르 끓는 소리가

세상에 허다한 발명품 중에

이런 복잡과는 거리가 먼

간단명료하고 쓱쓱 문지르면 되는 게 몇이나 있나?

고집을 말하려니 지우면서 앞의 말을 가로 막는다

손을 들어 막으려고 해도 중지시키려고 해도

자기는 눈도 끔쩍 하지 않고 수고할 건더기가 없다니

그러니 이기적이라고 다그쳐 대들어도

자기는 그냥 사각사각 문지르기만 하면 되니

그렇게 눈에 쌍심지를 켜고 달려들지 말아요

지우개는 아주 차분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나를 총 구멍으로 쏘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