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가을비 그친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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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가을비 그친 후 / 유리바다 이종인
초가을비 그친 후
나는 검정 바지에 흰옷으로 갈아입고 산으로 올라간다
아직도 젖어있는 무수 풀 헤집고 가노라면
묵직해지는 내 다리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다
가야지, 가야지, 오르고, 오르고,
발길 하나 없던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가야지
처절한 과거를 버리고 가는 이의 걸음에는 그림자가 없다
젖은 풀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을 때
나무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하나 둘 옷을 벗는다
붉어지기 전에 나는 그 하얀 속살을 훔쳐본다
나무에게는 속옷이 없다
갈아입어야할 옷만 있을 뿐이다
나도 속옷 없이 급히 겉옷만 입고 나왔다
나무가 옷을 갈아입고자 할 때 나는 옷을 벗고 불쑥 나갔다
놀라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 나무들
한 식구 한 동족임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일까
나는 그 중 한 그루 나무를 와락 끌어안았다
내 살과 나무의 살이 닿는 순간 파르르 떨림이 있었다
미안하다, 내가 너무 늦게 찾아왔구나,
나무는 말없이 가지와 잎사귀로 내 몸을 칭칭 감고 있다
내 고백은 숲에 가리워져 새나가지 않았다
댓글목록
유리바다이종인님의 댓글

아침에는 참새
한낮에는 비둘기
저녁에는 까마귀
산(山)은 말이 없는데,
세상은 너무 말이 많구나..
정심 김덕성님의 댓글

나무는 말없이 가지와 잎사귀로 내 몸을 칭칭
감고 있는데 세상은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초가을비 그친 후 귀한 시향에 머물다 갑니다.
시인님 감사합니다.
오늘도 행복이 가득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