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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의 초대시인] 이명윤 / 독거노인이 사는 집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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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320회 작성일 22-01-14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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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으로 시마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오신 이명윤 시인을 모십니다. 

이명윤 시인은 시마을 개설 초기부터 활동해 왔으며, 지난 2007년 시안으로 등단한 이후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등을 출간하였습니다. 

또한 <시마을 문학상>, <전태일 문학상> <수주 문학상> <민들레 문학상> <오월 문학상 등을

수상하는 등 활발한 문학활동을 펼쳐오고 있습니다. 

이명윤 시인의 대표작품과 함께 2022년 아름다운 새해 열어가시기 바라며

시마을 가족 여러분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약력.

1968년 통영 출생. 2007시안으로 등단. 시집 수화기 속의 여자』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시마을 문학상>, <전태일 문학상> <수주 문학상> <민들레 문학상> <오월 문학상> <구상솟대문학상> 등 수상. 시마을동인.

================ 


독거노인이 사는 집 9


이명윤



 그날 복지사가 무심코 내뱉은 한마디에 노인이 느닷없는 울음을 터뜨렸을 때 조용히 툇마루 구석에 엎드려 있던 고양이가 슬그머니 고개를 들고 단출한 밥상 위에 내려놓은 놋숟가락의 눈빛이 일순 그렁해지는 것을 보았다. 당황한 복지사가 아유 할머니 왜 그러세요, 하며 자세를 고쳐 앉고 뒤늦게 수습에 나섰지만 흐느낌은 오뉴월 빗소리처럼 그치지 않았고 휑하던 집이 어느 순간 갑자기 어깨를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뭔 일인가 싶어 주위를 둘러보니, 벽에 걸린 오래된 사진과 벽시계와 웃옷 한 벌과 난간에 기대어있던 호미와 마당가 비스듬히 앉은 장독과 동백나무와 파란 양철 대문의 시선이 일제히 노인을 향해 모여들어 펑펑, 서럽게 우는 것이었다.


  


숟가락들


이명윤



우는 숟가락이 있다

숟가락이 왜 우냐고 묻는데 그만 숟가락을 놓는 숟가락이 있다 당신도 우는 숟가락이군요 가만히 입술을 만져주는 숟가락이 있다

숟가락을 씻으며 나는 가끔 너무나 닮은 숟가락들이 우스워진다 오목한 숟가락으로 태어나 평생이 숟가락인 숟가락들

숟가락 위에 앉은 지구가 돌면 숟가락 있을 자리 찾아가는 숟가락 숟가락이 무거워 고개 숙인 숟가락 숟가락을 철없이 던지는 숟가락 어질러진 숟가락을 차곡차곡 쓸어 담는 숟가락

하늘을 나는 숟가락이 있다 먼 길 뛰어가는 숟가락이 있고 숟가락을 들고 줄을 선 숟가락이 있고 자꾸만 숟가락을 뒤집어 보는 숟가락도 있다 그래 봤자 숟가락인 숟가락

숟가락에 얹힌 무게는 달라도 하루가 기울면 일제히 서로를 껴안는 숟가락통의 숟가락들,

숟가락을 세다가 고개를 떨구는 숟가락이 있다 나도 어쩔 수 없는 숟가락이어서 미안하다는 숟가락이 있다

숟가락 위로 꽃잎이 툭툭 떨어지는 숟가락 울다가
웃는 숟가락이 있다


 

 


2015년 광도면민 체육대회 기념


이명윤



의아한 이름표를 달고 있다

어디선가 수년 넘게 기념의 시간을 묵히고 있다가

오늘에야 눈에 띈 것인데

광도면민은 맞지만

체육대회 근처엔 얼씬도 안 한 내가

뜻밖에 지금 그날의 함성으로 얼굴을 닦는 것이다

그러니까 햇볕 쨍쨍 퍼붓던 그날

광도면민도 아닌 북신동민인 어머니가

남사스럽게 줄을 두 번이나 서서 얻어 온 주책을

기념하며 가슴을 쓱쓱 닦는 것이다

널리고 널린 게 수건이라고 저흰 필요 없다고

아내가 두 손 저어도 끝내 두고 가셨던 고집을

기념하며 입술을 쭈볏거리며 닦는 것이다

목욕을 마치고 화장실 수납장을 열었는데

다들 어딜 가셨는지 그만 가슴이 철렁하다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수건 한 장,

생각하면 할수록 참으로 뜻깊고기념할 만한 순간이어서

어머니가 열심히 보낸 그날을

한 자 한 자 읽으며

온몸으로 기념하며

나는 흠뻑 젖은 저녁을 닦고 또 닦는 것이다

 

 


봄날

 

이명윤


 

눈이 마주쳤을 때

소는 웃고 있었다

 

우리 집 앞을 유유히 지나던 소,

마구간 느슨한 고삐 풀고

뒷산으로 산책 중인 웃음이었다

이장이 부랴부랴 방송을 하고

걱정이 웅성웅성 모여들었다

누구 집 소여, 어찌 나갔데,

엉거주춤 신발들이 우르르 뒷산으로

올랐으나 헛일이었고

웃음은

해거름 송아지 울음소리에 자진 귀가하였다

노인네들만 수북한 이 동네서

웃는 소만 본 게 아니다

웃는 개, 웃는 고양이, 심지어

웃는 닭까지 수시로 등장했다

원체 문고리가 헐렁한 마을이었고

웃음을 쫒아갈 기력이 없는 마을이었다

잠시라도 한 눈 팔면

집 나간 입꼬리가 노고지리처럼

동네 하늘에 둥둥 떠 다녔다


하루는 노인네들이 머리를 맞댔다

늙었다고 무시하는 거여,

우리도 못할 거 없지 암,

동구 밖 오래된 느티나무 이파리들이

반짝반짝 광을 내던 어느 날 아침

모두들 마을을 떠났다

저들끼리 덩그러니 남은 집들을 지나가며

 

꽃단장한 전세버스가

크게, 한 번 웃었다


 

 


거룩한 사무직


이명윤

  


시금치를 시금치라 부르지 못하고

눈만 끔벅거리는 염소들을 사랑한다 


보고서가 날아다니는 사무실은

푸른 초원 같아,

새떼처럼 우아하게 휘날리는 A4용지와 흑백으로 복사되는 당혹스러운

표정을 사랑한다

날아드는 상사의 눈빛을 피해 일제히 고개 숙인 모니터를 사랑한다

중세기 교회의 말씀처럼 납득할 수 없는 순간마다 천장에서 신호처럼

내려오는 밥줄을 무의식적으로 사랑한다

형광등 불빛 아래 숨소리마저 사무적으로 관습화된 노동을  

사랑할수록 점점 입체적으로 온전해지는 스트레스를

제정신이 아닌 정신의 세계를 사랑한다, 그리하여  


귓속말이 미치도록 아름다운 복도와

찬란한 훌쩍거림을 멈추고 전송하는 욕설과

삼삼오오 모여드는 신발들을 사랑한다

만일을 대비하여

복도 끝에서 지키고 선 소화기를 사랑한다 


들어도 못 들은 척 능청스러운 얼굴을

이젠 사용법도 흐릿해진 하루를 숙명적으로 사랑한다


 


해변가의 돌들


 

이명윤


 

누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그 소문의,

 

꼬리를 물고

그 꼬리를 꼬리가 물고

어떤 날은 바람까지 등에 업은 꼬리가 꼬리를 물고

꼬리가 아프다며 허옇게 질릴 때까지 꼬리에 꽉 꼬리를 물고

성급한 꼬리는 저를 낳은 꼬리보다 먼저 달려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그러는 사이, 돌들은 하나같이

둥글둥글해졌고

미끌미끌해져서

여기저기 사방으로 흩어져 살았다  


어쩌다 만나기도 하지만

서로를 도저히 알아보지 못한다 


새빨간 거짓말처럼,

눈도 귀도 입도 지워진 얼굴로 모두들

닮아 있었다


 

 


통영 사람들은 일주일에 한 번 시락국을 먹는다

이명윤 



 이른 새벽 통영 서호시장 뒷골목에 가면 술이 덜 깬 구두든 단단히 묶은 운동화든 비린내 나는 장화든 건들건들 슬리퍼든 모두들 낯선 얼굴이지만 긴 나무의자에 서로의 어색한 엉덩이를 달싹달싹 붙이고 엄마 말 잘 듣는 아이들처럼 일렬로 앉아 겨우내 그늘에 말린 배추 이파리에 된장 풀어 끓인 그 국을 공손히 먹는다 이 거룩한 예배로, 어김없이 다툼과 낭비로 살았던 우리들의 한 주를

 

신은 그래, 그래, 알았어, 하며 부드러운 미소로 퉁쳐 주신다


 


 


귀신이 산다


 이명윤


 

야시골 서편 오래된 폐가에

귀신이 산다고 모두들 수군거린다

거뭇거뭇 해가 지면

기이한 울음소리 들려온다며 무서워한다

어릴 적 자주 놀러 간 그 집

내력 잘 아는 나는 슬그머니 웃음이 난다

건넌방에 옛 동무랑 오순도순 누우면

가만히 색동 이불속 발가락 간질이던

창문 밖 쓱 긴 머리카락 드리우다 밤이면

어둑한 뒷간에 몰래 숨어

두 손 들고 히죽거리던 처녀귀신

허나 벌써 수십 년도 지난 일

지금쯤 무정하게 늙은 그녀만 남았을 텐데

관절에 힘도 없고 머리도 허옇게 새었을 텐데

침침한 저녁 문지방 넘다 소복이 걸려

문짝과 함께 나자빠지진 않았을까

흰 고무신 두 짝 가슴에 안고

기울어진 대청마루에 중얼중얼 앉아 있진 않을까

산짐승 무서워 빈 독에 숨어 뚜껑을 닫고

한 달이 넘도록 꺼이꺼이 울고 있을지도 모르지

, 오늘 같은 밤에 지붕 우에 앉아

아이 추워, 아이 추워, 청승맞게 칭얼대면 어쩌나

가만 생각하니 은근 걱정되는 것인데

샛바람만 불어도 덜덜거리는 무서운 적막

부뚜막 온기가 사라지고 수도도 전기도 끊기고

택배마저 오지 않는 폐가에 남아


귀신은 도대체, 저 혼자서

무얼 먹고 살아가나

 


 

복지과 가는 길

 

이명윤

  


복도를 걷는데 등 뒤에서

달그락달그락 운다

구두 뒷굽의 구멍이 돌을 삼킨 것

노인이 걸음을 뗄 때마다 어느 날

구두를 찾아온 슬픔이 말을 거는 것이다

이 건물엔 복지과가 없다는 말은

도무지 들은 체 않고 달그락달그락,

풀 한 포기 없는 복도를 따라오며

연신 중얼중얼거린다

먼 나라 어느 부족의 주문 같은

중얼중얼,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노인의 가슴이 삼킨 돌들이

정신없이 말을 거는 것이다

달그락달그락 쯤이야 거꾸로 뒤집어

탁탁 치고 그래도 안되면

쿠폰 한 장으로 조용할 수 있겠지만

중얼중얼은 어떻게 하지 


달그락달그락, 중얼중얼,

말을 탄 노인이

쉬지 않고 황야를 달린다  


분명 이 세계 어디엔가

태양처럼 떠 있을 


복지과를 찾아서


 

 

 


기다린다

 

이명윤

 


신호등 색깔로 기다리고 커피 잔으로 기다리고 가로수 잎으로 기다리고 버스정류장 의자로 기다린다 기다림이 숲에서 나와 긴 목을 흔들며 걸어가고 있었다

기다린다 기다림을 세어가며 기다리고 깜빡 졸음으로 기다리고 다시 처음부터 기다린다 순한 눈을 가진 기다림이 나를 볼 때마다 어디선가 젖은 바람이 불어왔다

기다린다 조용한 노래로 기다리고 무서운 침묵으로 기다리고 훌쩍거리는 계절로 기다린다 기다림과 기다림이 손을 잡고 떠나간 거리는 기다림 이전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어느 날 누군가 한 폭의 그림을 주고 갔다 기다림이 기다림에서 멀어지면 기다림은 완성될 수 있을까 조용히 그림 속에 들어갔다 기다림의 등에 기대고 누워,

기다린다 기다림이 온전한 사물이 되어 즐거워질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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