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초대시인] 허영숙 / 봄, 본제입납 외 9편 > 이달의 시인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시마을 Youtube Channel

이달의 시인

  • HOME
  • 문학가 산책
  • 이달의 시인
    (관리자 전용)
☞ 舊. 이달의 시인
 
☆ 문단에서 주목받고 있는 중견시인의 대표작품(自選詩)을 소개하는 공간입니다

[5월의 초대시인] 허영숙 / 봄, 본제입납 외 9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4건 조회 1,806회 작성일 22-05-01 20:53

본문



이달의 초대시인으로 허영숙 시인을 모십니다.

허영숙 시인은 시마을 개설초기부터 시마을에서 오랫동안 활동해 왔으며,

시마을 운영위원회 사무국장을 오랫동안 맡아 시마을 발전을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2006시안으로 등단하였으며, 2018<전북도민일보> 소설부문 신춘문예에

당선된 바 있습니다. 시집으로 바코드』 『뭉클한 구름등이 있습니다.

 

허영숙 시인의 따뜻하고 감미로운 시향과 함께 다름다운 5월 열어가시기 바랍니다.

 

 =======================


, 본제입납 외 9편  

  -어느 실직자의 편지

 

   허영숙


 

봄은 땅을 지펴 온 산에 꽃을 한 솥밥 해 놓았는데 빈 숟가락 들고 허공만 자꾸 퍼대고 있는 계절입니다

 

라고 쓰고 나니

아직 쓰지 않은 행간이 젖는다

 

벚꽃 잎처럼 쌓이는 이력서

골목을 열 번이나 돌고 올라오는 옥탑방에도

드문드문 봄이 기웃거리는지,

오래 꽃 핀 적 없는 화분 사이

그 가혹한 틈으로 핀 민들레가 하릴없이 빈둥거리는 봄볕과 일가를 이루고 있다

 

꽃들이 지고 명함 한 장 손에 쥐는 다음 계절에는

작약 한 꾸러미 안고 찾아 뵙겠습니다 라는 말은 빈 약속 같아

차마 쓰지 못하고

 

선자의 눈빛만으로도 당락의 갈피를 읽는 눈치만 무럭무럭 자라 빈한의 담을 넘어간다 라고도 차마 쓰지 못하고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다 그치는 봄날의 사랑 말고 생선 살점 발라 밥숟갈 위에 얹어 주던

오래 지긋한 사랑이 그립다 쓰고

 

방점을 무수히 찍는다. 연두가 짙고서야 봄이 왔다 갔음을 아는

 

햇빛만 부유한 이 계절에,

 

* 본제입납(本第入納) : 자기 집에 편지할 때에 겉봉 표면에 자기 이름을 쓰고 그 밑에 쓰는 말

 

 

 

 

 

 허영숙



서늘하고 단단한 골질은 좀처럼 순해질 줄 모른다

 

밤을 뒤척이는 동안

용서와 모략이 서로 교행한다

뒤끝은 왜,

 

어둠에 무뎠다가 빛에 새로워지나

 

돌출은 서로 버티는 세계의 무기

너를 찌르거나

스스로 나를 찌르거나

 

몸의 더운 기운이 좋은 기별로 왔다면

동백처럼 한 모가지 단숨에 꺾어 줄 줄도 알았겠지

늦더라도

목련처럼 천천히 덜어 낼 줄도 알았겠지

상처를 수락하기 어려워 세운 뿔

내 핏자국만 비린내 나는 후회를 새로 얽고 있지만,

 

그을음도 남기지 않고

터진 실밥처럼 줄줄이 풀려 사라지는 노을을

천천히 오래 바라보다보면

멀리 나가 있던 젖은 마음이 마침 돌아와 뿔을 적신다

피를 팔아서라도 지키고 싶던

단단한 뿔은 투명해지다 사라진다

 

아직도 진물이 흐르는

달 만 한 옹이를 하늘에 울컥 낳아 놓고

 

 

 

나비그림에 쓰다

 

   허영숙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것은 다 꽃길이라 믿었던 시절 득음한 꽃들의 아우성에 나도 한 때 꽃을 

사모하였다 꽃을 사모하니 저절로 날개가 돋아 꽃 안의 일도 꽃 밖의 일도 두근거리는 중심이 되었다

꽃술과 교감했으므로 날개 접고 앉은 자리가 모두 꽃자리였다

 

  꽃길을 날아다녔으나 꽃술을 품었다고 흉금에 다 아름다운 분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겹눈을 가지고도 읽지 못한 꽃독에 날개를 다치고 먼 남쪽 다산에 와서 앉는다 낮달이 다붓하게 따라

온다 주전자에는 찻물이 끓고 *꽃 밖에서 훨훨 날아다니고 꽃술을 사모하여 맴돌지는 말아라 오래 전 

날개를 다치고 이곳에 먼저 와서 앉았던 사람이 더운 붓끝으로 허공에 쓰고 있다

 

​  *정약용의 시 題蛺蝶圖에서 인용

 

  


 

환일(幻日)

   -세 개의 눈동자

 

  허영숙



  골방 같이 어둑한 겨울 숲을 빠져나와 고개를 들었을 때

  구름을 조금씩 밀어내며 나를 보는 얼굴

 

  강물에 비친 제 눈동자나 들여다보며 놀던

  아슴한 날의 상이 굴절되어 맺힌 기억 같은 것인가 하면,

  반야심경으로 마음을 다스리며 평생 몸 안에 슬픈 등 하나 켜고 산어머니의

  울화 깊 은 눈동자에서 박리 되어 나오는 울음 같은 것인가 하면,

  온몸을 그늘로 치장하고 살다 어느 날 문득 얼뜬 얼굴로 건네던 안부 인사가

  낮밤 불길하게 햇무리 달무리지다 스스로 해가 되어 하늘로 들어간 이의

  눈동자인가 하면,

 

  움트는 첫 빛을 맨 먼저 보겠다고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의 지친 얼굴 말고 가만가만 저물어

가는 하늘에 수런거리는 옛 기억이라도 길들이며 사는 사람의 얼굴,

 

  그런 늦은 오후의 얼굴에 고인 눈동자

 

 

 

 

나는 걸었는데 너는 안 왔다고 하는 전화

 

   허영숙



얼마를 더 가야 하는 것일까, 나는 걸었는데

너는 안 왔다고 하는 전화

몇 개의 산맥

몇 굽이의 물목을 돌며 휘어져야 받을 수 있을까

나는 걸었는데

너는 안 왔다고 하는 전화

너무 촘촘하면 서로 상처가 될까 간격을 두는 나무의 경전에 걸려

그 페이지 묵독하며 수행중인가

 

보내고 오지 않는 답장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안쪽으로 스며들지 못하는 신호음만 소용돌이치다 멎는다

 

나의 전언은 공중에 갇혀 있다

 

  

 

 

곡우


  허영숙



비 오자 겨우 논물 드는데

다 버리고 남도로 간다는 당신의 말은 슬펐네

곳간의 단단한 볍씨 같은 말

땅 헐거워지면 뿌려지고

비가 오거나

비가 오지 않더라도 당신이나 나나

살아가고

살아지고

 

제 한 몸 스스로 거두는 나무도 꽃을 버리고

허공을 비워두네

물자리 깊은데

서로 엉성한 절기를 지나네

 

고랑 터는 비라 하더라도

아프게 우는 사람에게는 치명적이어서

하늘을 다그치네

 

구름이 숨차게 뒤를 따르네

 

청명 지나 입하사이 한 사람이 깊숙이 숨네

 

올해는 울음도 풍년이어서

그 질긴 곡식 낫질하느라 손 마디마디 붉게 헐겠네

 

  

 

 

죽선

 

  허영숙



속없어 보여도 저미면 뼈가 여럿입니다

뼈와 뼈를 선지扇紙로 묶으면 서늘한 숲이 생기지요

한여름의 폭염

그 후방에 나 앉아 포개진 댓살을 펼쳐 흔들면

숲에서 찬바람이 일제히 몰려오는 것인데

그럼 바람은 어디서 생겨나는 것인지

허공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고요한 듯 보여도 수많은 바람이 살고 있지요

댓살을 흔들 때 흩어지거나 포개지면서

대 안에 숨은 서늘한 그늘을 베껴내며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인데

댓살이 차고 시원한 바람을 몰아 올 수 있었던 것은

고비를 넘을 때마다

마디 속에 생긴 그늘 때문이지요

마디는 다시 한 생애를 밀어올리고

곧은 생애에 또 한 마디가 자라나고

그늘은 그때 생겨나 댓살에 스미지요

밀려나면 또 다시 몰아오고

빙글빙글 바람을 돌리는 댓살 속에

고비도 없이 한 시절 그럭저럭 고요하게 건너가는

나의 지루한 문양을 그려 넣으면

바람을 접고 또 접어 내 어깨를 후려쳐 줄까요

   

 

 

놓고 오거나 놓고 가거나

 

​   허영숙

 


언제부터 있었나 저 우산

산 적 없는 낯선 우산이 꽂혀 있다

비올 때 내게 왔다가 비 그치자 가버린 사람이 두고 간 것

오래 거기 있는 줄 모르고,

손잡이의 지문

아직 남아 있는 줄도 모르고,

 

나도 어디 놓고 온 우산은 없나

누가 펼쳐보고

내가 놓고 간 우산인지도 모르고

적셨다 말리며

적셨다 말리며 밥집으로 찻집으로 녹을 키우며 흘러가고 있을까

 

비올 때 간절하다 햇살 돌면 잊어버리는 사람처럼

살 부러져 주저앉을 때까지 손잡이 지문을 바꾸는

저 우산은

호적이 없다

 

 

 

 

우리는 너무 오래 서있거나 걸어왔다

 

  허영숙


오래 걷다 잡힌 발의 물집을 위로하자고

죽어서 누운 나무의 등뼈 한 가운데 앉는다

나무가 눕는다는 것은

생사의 금을 긋는 일

햇살과 바람의 간섭으로

틔우거나 피우거나 찬란하거나

보내거나 견디거나 하던 극복의 기록이

오히려 투쟁이었다는 듯

살아서 서 있다는 것이 형벌이었다는 듯

마른 수피 한 벌 입고 누워버린 나무는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골진 자리에 하얗게 피고 있는 독버섯

죽은 나무에 햇살 구멍을 만들어 분주히 들락거리는 개미들

아직도 파랗게 날 선 풀꽃군락을 지날 때도

그늘마저 물들이기 위해 골똘히는 느티나무를 지날 때도

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이 여기 있다

닫히는 중인 줄 알았는데 한 세계가 새로 열리고 있었다

다른 종들의 거처로 먹이로 다시 쪼개지고 쪼개지다 보면

마침내 흙

물집 잡혔다고 주저앉은 내 발도 마침내 흙

봄을 알리지도 못하고

언젠가는 봄을 보지도 못할 것 끼리 거룩하게 섞이고 섞여

다음 생이 목생이라면 오백 년을 산 나무의

일 년 생 잎으로 와서 함께 펄럭여 볼까

 

  

 

 

모란꽃살문


  허영숙


한 시절 봄을 함께 거느리던 붉은 모란

아주 오래 소식 없어

먼 바깥에서 잘 살고 있겠거니 여긴 그 모란

절집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시간의 풍상을 맞으며 꽃의 단청은 버렸으나

얇은 창호지 한 장 사이에 두고

바람과 햇살을 걸러 들여 낯빛이 고고하다

 

모란의 손을 잡고 지란지교의 날을 들추는데

꽃술 안쪽의 청명한 세계가 따뜻하게 건너온다

여자를 버려서 낡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전에 새로운 꽃말을 새기고 있는 모란

창호지 너머 어간*으로 내린 모란의 뿌리

깊고도 단단하다

 

평생 결가부좌로 여기에 피어있을 모란

나는 그녀를 붉은 꽃으로만 읽으려 하고 모란은

내 외진 기슭까지 읽으니 아직 세속의 경계를 넘어서지 못해

내게 너무 낯선 모란

 

절집을 나서는 등 뒤

잿빛 소맷자락 사이 희고 여린 손으로 합장하는 모란

마음이 소슬하여 세 걸음 가다 돌아봐도 모란

돌계단 아래서 또 돌아봐도 모란

 

꽃물 져도 모란은 아직 모란

내게는 평생 붉을 모란

 

  * 법당의 중앙 통로

 


 

약력

2006시안으로 등단

2018<전북도민일보>소설부문 신춘문예 당선

시집바코드』『뭉클한 구름

2016년 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추천3

댓글목록

남기선님의 댓글

profile_image 남기선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허영숙시인님의 화사한 미소에
봄이었구나 ! 하고
계절을 실감합니다.

살아가고
살아지고......
이 문장이 눈에 박히고  마음에 박히는  하루를 보냅니다.

박일만님의 댓글

profile_image 박일만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작성일

시 꾸러미 참 좋습니다
허영숙 시인님의 따듯한 마음이 듬뿍 담겨 있네요
한 편 더 소개합니다 ~~


커피를 내리며 / 허영숙


커피를 내리는 일처럼
사는 일도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둥글지 못해 모난 귀퉁이로
다른 이의 가슴을 찌르고도
아직 상처를 처매주지 못했거나

우물 안의 잣대 품어
하늘의 높이를 재려 한 얄팍한 깊이로
서로에게 우를 범한 일들

새벽 산책길
이제 막 눈을 뜬 들풀을
무심히 밟아댄 사소함까지도
질 좋은 여과지에 거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사는 일은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는 것처럼
마음과 마음은 온도 차이로 성에를 만들고
닦아내지 않으면 등을 보여야 하는 슬픈 배경

가끔은 아주 가끔은
가슴 밖 경계선을 넘어와서
눈물 나게 하는 기억들

이 세상 어디선가
내게 등을 보이고 살아가는 사연들이 있다면
걸러내어 좋은 향기로 마주하고 싶다

커피 여과지 위에서
잊고 산 시간들이 따뜻하게 걸러지고 있다

Total 24건 1 페이지
게시물 검색

 


  • 시와 그리움이 있는 마을
  • (07328) 서울시 영등포구 여의나루로 60 여의도우체국 사서함 645호
  • 관리자이메일 feelpoemtop@hanmail.net
Copyright by FEELPOEM 2001.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