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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 그 집 외 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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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ofile_image 시마을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5,526회 작성일 23-02-27 1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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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초대시인으로 박수현 시인을 모십니다.

박수현 시인은 2003년 계간 시안으로 등단하여 문단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으며

시집으로운문호 붕어찜』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페인팅등이 있습니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을 수혜하였으며

4회 <동천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습니다.

 

박수현 시인의 깊이있고, 정감있는 시편들과 함께 따뜻한 봄날 열어가시기 바랍니다.


============ 

 

  박수현

 

 

  그 집은 사철 겨울이었네 영지못을 메운 터에 자리한 국민주택 13, 담쟁이넝쿨이 온몸을 뒤채며 벽마다 기어올랐다네 삐걱, 철대문을 밀었을 때 사월에도 꽃망울 틔우지 못한 목련 한 그루가 아는 체를 했네 테너가수 N선생과 치매든 모친, 집안일 하는 아주머니, 영 철들지 않을 표정의 딸이 사는 집에 나는 길고양이처럼 잠행했다네 갓 스물, 입주 과외하던 내가 그 애에게 가르치는 것보다 그 집은 더 어려운 문제를 내게 내주곤 했다네 그 앤 자주 가출했고, 할머니가 종일 단물을 빨다 뱉은 쥬시후레쉬민트 은박지로 새를 접어 날렸다네 그 애가 접었던 종이새들이 날개를 퍼덕이는 소리였을까 저들끼리 모가지를 감고 조르며 오르는 담쟁이넝쿨들의 밀어(密語)였을까 달빛이 푸른 속눈썹을 늘이는 추운 밤이면 기울어진 가구 틈어디선가 그 소리는 더 또렷이 새어 나왔다네 그런 밤이면 내 청춘의 페이지가 남루하게 시드는 담쟁이넝쿨 아래 나는 더 어두워져 가위에 눌렸다네

 

  지난밤, 어느 손이 나를 그 집에 이끌었다네 고급 빌라가 들어선 거기서 교통사고로 세상을 뜬 N선생과반쯤 닳은 놋숟가락 같은 얼굴로 껌을 씹어대는 할머니와 볕뉘 같은 눈을 한 그 애를 스쳐 보았네 더 멀리 도망칠수록 나는 깨진 등피(鐙皮) 같은 그 집에서 더 어둡게 저물고 있었네

 

- 문파2022년 겨울호

- 문학바탕2023년 봄호/재수록

 

  

 

 

    박수현

 


요 며칠 앵두 따러 다녔어요

아파트 산책로 한 그루 앵두나무가 나를 잡아끌데요

앵두가 익을 무렵인 줄 몰랐는데

가지 찢어지게 영글어 바알갛게 쫑알거리데요

누구도 눈길 주지 않는다고 뾰로통 입술을 내미네요

사람들은 저마다 바쁘다는 핑계로

눈길 하나 건네지 않았겠지요

별 볼일없는 나 같은 사람이나

앵두에 눈 맞추며 가슴 콩닥거리겠지요

손가락을 디밀어 빗질하듯

가지 밑 다닥다닥 붙은 앵두알을 훑었지요

탱글한 앵두알에 금방 손바닥이 흥건해지는군요

앵무(鸚鵡)들 허천나게 탐낸다는 그것을

혓바닥에 올려 오밀조밀 궁굴려봅니다

늦봄 한나절을 잠시라도

한 마지기 그늘에다 한 모숨 초록바람까지 더해

붙잡아 둘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내 얕은 잠 속을 자박자박 서성이다 멀어진

당신의 발자국 소리도 다가오는 듯합니다

저 바알간 앵두알을 삭여 앵두주를 담글까 봐요

숫돌처럼 무거운 봄날이 다 가고 나면

당신 한잔 자시러 오실래요?

하 독()하도록 맑고

맑도록 독()한 앵두주

앵두나무 기슭에 매달린 하늘 무심히 보듯

무심히 한잔 자시러 오실래요? 

-시인시대》 2022년 가을호겨울호 재수록

 

 


 

   박수현

 

  섬의 둘레를 따라 진초록 물결이 희게 스미고 있었다 그가 바이올린을 든 채 구부정히 서 있었다 바이올린은 언제부터 연주하셨나요라는 나의 물음에 그의 입가에 잠깐 미소가 번졌던 것 같았다 그의 발치에 가파르게 핀 해국들이 투명한 보라빛으로 글썽였다 부신 가을햇살 때문에 하늘과 수평선이 잘 분간되지 않았다

 

  나는 그와 안데스 지역의 악기를 거래하는 점포에 들어섰다 그가 차랑고(Charango)의 현을 튕기자 차고 어두운 빗소리가 창의 덧문을 뚫고 들이쳤다 점점 굵어지는 빗소리, sisay sisay~* 맨발의 인디오 아이들이 라마떼를 몰며 집으로 향하는 팜파스의 햇노란 밀밭길을 돌고 있었다 그가 불쑥 박쥐우산 속으로 나를 끌어당겼다 지상의 모든 빗소리가 한꺼번에 귓바퀴에 모이는 것 같았다 그의 왼팔이 내 젖은 어깨를 감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차랑고가 연주하는 악보(樂譜)의 음표들이 빗방울처럼 내 머리칼에 맺히며 가망 없이 흘러내렸다

 

  해식애(海蝕崖)의 윤곽을 따라 바람이 거칠게 불었다 까마득히 하늘이 부풀며 바닷새들이 먼지처럼 부유하며 날아올랐다 어디로 떠날 건가요라는 물음에 그는 아무 말 없이 보이지 않는 수평선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세계의 흘수선이 바람에 부대끼며 세계의 어둠 속으로 잠기고 있었다 내 전 생애가 행려병자처럼 표류하다 좌초한 그곳 파도소리가 별빛들의 쓸쓸한 피치카토 아래 잠드는 그곳 마침내 그가 나의 가장 멀고 슬픈 해변이 된 그곳

*에콰도르 말로 빗속에서 피는 꽃

 

-시산맥2022년 겨울호  

 



한계단육면체

 

     박수현

 

 

계단들이 여기저기 장마 끝 푸성귀처럼 웃자라고 있다

무릎에 철심을 박고 나사를 조인 뒤부터

계단을 밟는 게 허공을 밟는 듯 오금이 저린다

돌아보면 세상은 계단의 참혹한 식민지다

동네병원부터 지하철 마트며 뒷산 산책로까지

나는 밀실에 숨은 채 등사기를 돌려

전단지를 찍는 비장한 레지스탕스는커녕

식민지의 적자(赤子)가 되어 무참하게 굴복한다

난간에 기댄 채 심장이

간이 마구 오그라드는 듯하다

그러니까 정작 복합골절을 당한 쪽은 무릎이 아니라

내 애먼 심장이나 간 어디쯤일 성싶다

층층 계단 어차피 계단 삐꺽 계단 다짜고짜 계단

나는 계단을 오르는지도 내리는지도 모르고

계단참에 껌딱지처럼 물끄러미 달라붙은 채로 서 있다

나는 무작정 펼쳐진 악보의

참 서러운 도돌이표가 된 게 틀림없다

여기까지 생각하는데 갑자기

가로세로 계단들이 아코디언처럼 촘촘히 접혔다가

수평선처럼 쭈욱 펼쳐지더니

월식 때 달이 지구그림자에 가리듯이

담배가게 옆 골목으로 사라지는 것이었다

  

-서정과 현실》 2022년 상반기호

-푸른 시의 방》 재수록,

-《 시인광장올해의 시 100 




인옷가게, 압구정

    박수현

 


  동네에 무인 아이스크림가게, 무인 과일가게, 무인 만화방에 이어 무인 빈티지 옷가게도 들어섰다 두 번째 주인을 찾아드립니다’,’라는 문구가 쇼윈도에 나붙어 있는 집 <압구정> 그 옆을 지나치면 교통카드나 신용카드를 출입문 키에 대면 문이 열립니다센서의 하이톤 음성에 문을 밀게 된다 주인대신 전신 거울과 자동 계산대, CCTV가 손님을 반긴다

  쇼룸 안엔 70~80년대 레트로부터 밀리터리룩, 시스루룩 ,최신 힙합스타일과 모자 신발 핸드백들이 애먼 표정으로 눈길을 흘낏거린다 행거의 옷들을 뒤적여본다 그것들이 살 냄새가 그리운 유기견 마냥 우호적인 포즈로 눈알을 반짝이며 꼬리를 살랑인다 수박색 원피스를 골라 나를 끼워 넣자 연속 꽃무늬 패턴이 망가지며 눈살을 찌푸린다 전신 거울 앞에서 마스크를 내리고 스트라이프 블라우스를 턱밑에 받쳐보다 내려놓는다 핫한 압구정에서 이 변두리 동네까지 날아온 갖가지 스타일 룩들이 봄날을 다 낭비하고 누렇게 떨어지는 창밖 목련꽃잎처럼 숱한 날의 나를 입었다 팽개친다

  제 각각 수다스런 생의 스무 고개를 넘어온 것들일까? 아직 오만한 저 빨강 스웨터는 어긋난 시간, 저 플리츠 스커트는 불량한 청춘, 저 청바지는 한때의 열렬했던 짝사랑, 저 체크무늬 셔츠는 푸른 눈물 한 방울, 저 행거 밑 떨어진 단추는 누가 흘린 잡담일까

  두 번째 주인을 만나면 헐렁해진 이것들 어깨에 각이 세워질까 둥글둥글 몽상을 굴리는 동안 문득, 쇼룸이 깊어진다 아직 의류수거함까지는 더 걸어가야 한다는 헌옷의 감정*에 잠시 젖어든다 갈 곳 없는 비대면 시대, 주섬주섬 본 적 없는 사람의 모자와 재킷을 걸치고 인사도 없이 무인 가게를 빠져 나온다

  

*추프랑카 시인의 시

 

- 시와 문화2022년 가을호, 겨울호/[이 계절의 시] 에 평과 함께 재수록

 

 

 

보라를 헹구다

   -브룬펠시아 쟈스민

 

    박수현

 


진보라와 연보라와 하양을 한 우물에서 길어올리지

당신이 내 가슴의 영창(映窓)에 심어 두고 떠난 꽃나무

진보라는 창호지 영창에 뜬 그믐빛 같은 것

보기에는 그래도

연보라는 진보라의 드러난 종아리 같은 것

찰박찰박 물소리 밟으며 진종일 물소리에 바래며

밤마다 움켜쥐며 자는

또한 내 아픈 종아리 같은 것

하양은 내 눈까풀까지 파고 들어와

아스라한 꿈의 처마를 밝히다가

당신의 발자국 소리처럼 신작로 너머 사라지지

낮결 동안 밤결 동안

당신을 생각하는 일은

저 꽃들이 보라를 헹구는 것 같겠지

혼자서 우물 속이나 들여다보며

서늘한 가슴이나 한 계절 쓰다듬는 일이지

  

* 쟈스민 향이 나며 꽃 색깔이 보라에서 연보라, 흰색으로 변하는 가지과 식물.

꽃말은 yesterday- today- tomorrow , 또는 moring- day-night .

 

-두레문학2022년 가을호 

  



픈 알리바이

 

​    박수현

 

  지하철 안은 이내[]가 서린 듯 푸르스름한 빛이 감돌았다 프란체스코 여성의 집에서 <사진으로 쓰는 자서전강의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 이었다   상고머리에 사탕 무늬 원피스의 계집아이가 다가와 내 옆자리에 앉았다 아이는 품에 눈매가 홍사초롱처럼 밝은 토끼 한 마리를 안고 있었다 아이는 엄마가 또 딸을 낳았어!”라며 훌쩍거렸다 모란꽃이 물 위의 달처럼 맑고 환한 외가 재실 모퉁이가 아른거렸다 얼마 후 아이는 왼손으로 밥을 먹다 엄마에게 밥그릇을 빼앗겼다며 다시 눈물을 글썽였다 집이 철거되는 날이었던가아이는 키우던 토끼를 몰래 숲에 놓아주다 혼이 났다며 무릎에 얼굴을 묻고 서러워했다 아주 오래전 달무리에 든 할머니가 달무리 뒤에서 나타나 넌 나쁜 아이야아픈 아비 약에 쓸 건데쯧쯧!”하며 하얗게 노려본다고 했다 얘야괜찮아괜찮단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자 아이가 저만치 달아나기 시작했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아이는 승객들 틈새로 서둘러 계단을 올라개찰구를 빠져 나갔다 나는 놀라 뒤쫓았지만 어지럽게 흩어지는 발자국들에 떠밀려 아이와의 거리는 점점 멀어졌다 역을 나서자 늘 보던 거리가 소름끼치게 낯설었다 불현듯 내 손에 무언가 잡혔다 토끼의 긴 귀였다 슬픈데 슬프진 않았다 눈을 떴다 열차는미제사건파일을 보관한 서랍이 탁닫히듯이내려야할 역을 막 지나치고 있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2년 6월호 발표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 좋은 시 500




빨강을 고백하다

 

   박수현

 

 

  시집표지로 빨강을 선택했다 빨간색 구두를 한 번도 신어보지 못해서라는 내 말에 그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의 웃음에 빨강 플러그를 꽂는다 중세엔 꼭두서니, 연지벌레 자주조개 푸르푸라에서 빨간색을 얻었다고 했다 아마란스 버건디 애플캔디 카디날 스칼렛 루비 라스베리 카멜리언 카치닐, 나는 보학(譜學)을 공부하듯 빨강의 족보를 찾아 일일이 호명한다 도돌이표도 없이 멋대로 반음을 올리거나 내린 빨강의 음계들이 담장에 찌글어진 저 넝쿨장미처럼 소란하다 내 애먼 청춘의 악보를 유리창 너머 다 훔쳐봤을 빨강들이 아직도 내 몸의 구석구석에서 나를 엿보는 것 같다 나는 참 즐겁게 빨강에 높은음자리표를 뺀 내 몸을 들키고 만다 아프리카 어떤 부족은 장례식 때 빨강 상복을 입는다는데, 빨강 시집표지와 신어본 적 없는 빨간색 구두 사이에서 나는 내 죽음 안에 짐짓 빨강을 부장(副葬)한다 그가 여전히 웃고 있다 그의 웃음에서 빨강 플러그를 뽑는다

  

-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20225월호

 

   

  


벚꽃 유감(有感)

 

     박수현

 

 

그녀를 문병한 뒤 벚꽃 길을 따라 차를 몰았네

부은 손발을 쓰다듬던 감촉이

핸들 잡은 손바닥에서 지워지질 않네

바람에 날리는 저 분홍들을 다 모을 수 있다면

그녀를 붙잡을 수 있을까 생각하네

벚꽃 하도나 분분해서

한사코 찾을 이름이 있다는 듯

브레이크와 엑셀 페달을 번갈아 밟네

어린 손목들을 버려둔 채 매정하게

먼 곳으로 떠나는 마음처럼 벚꽃 날리네

식구들 중 가장 늦게 잠들고

가장 일찍 일어나던 그녀가

잘 쑤던 메밀묵과 호박범벅을 떠올리다가

노인의 무릎처럼 검게 젖은 벚나무를 바라보네

열어 논 차창으로 쏟아지는 벚꽃 때문에

메밀묵도 호박범벅도 없는데

자꾸만 목이 메네

처음으로 나보다 먼저 잠자리에 들

천지간에 그녀가 저만치 걸어가네

저기갓 때를 입힌 분홍 하나

천지간에 분홍 하나 패총처럼 쌓이겠네

 

-문학청춘》 2022년 여름호

  

 

 

  - 그의 얼굴

 

    박수현

 


그는 늪 기슭에서 낚싯대를 드리웠다

지난밤달빛 같은 잔기침을 앓던 그

건너편 바위의 흰 산나리 무리가

초록 물그늘 사이사이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입술이 파래지게 헤엄을 치던 나는

물 밖으로 나왔다 햇살을 받은

잔돌들이 발바닥에 따뜻하게 밟혔다

힘껏 조약돌을 던져 물수제비를 떴다

초파일 연등처럼 넝쿨지는 물무늬 속에서

젊은 그는 오르간의 건반을 누르고

아이들은 갯가의 옥수수가

햇노랗게 여물도록 노래를 불렀다

바닥을 모른다는 늪의 수면에

은입사 금입사된 햇살들이

한숨 같은 바람결에도 아득히 부서져 날리고

창포며 부들생이가래 틈서리엔

자라새끼들이 가뭇하게 오글거렸다

밀짚 모자 밑으로 흘러나오는 가쁜 기침소리에

늪도 쿨룩쿨룩두어 뼘 더 어둡게 감겨들었다

자라 피가 담긴

자 무늬 흰 약사발이 마당에 내던져졌다

돌확 옆 맨드라미도

신열을 앓으며 피점처럼 붉게 타올랐다

늪의 자라들이 다 파먹었는지

무성한그리운 그의 얼굴이

늪의 수면에서 잘게 부서지다 가라앉았다

나를 낳고 오동나무 한 주를 심었다던

턱이 긴 그가 오래 뒤돌아보았다

 

한국시인협회에서 발간한 나의 얼굴너의 얼굴그의 얼굴』 시리즈



 

 

나팔꽃

 

    박수현

 


당신의 손목은 무사한지요

보드랍게 깍지 끼어 건네던 손길이 어디로 가나요

지난여름 여리고 따듯한 우주의 새끼들을

슬하에 풀어 기르던

그 푸성귀처럼 푸른 힘 이제 어디로 가나요

당신의 슬하에 고요가 깊어지고 있어요

저것 좀 보세요 사방 흰 중환자실

손등의 힘줄에도 당신의 덩굴손들이

있는 힘을 다해 기어 오르네요

막무가내로 기어 오르네요

당신의 눈빛이 흔들리고 있어요

당신은 이제 입술을 닫았는데

조곤조곤 당신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이 가을 내 목소리를 듣지 못하는

당신의 손목을 덩굴손처럼 부여잡아요

당신에게 안부를 전하려면

나는 저 작고 까만 씨앗들을 얼마나 모아야 할까요

얼마나 높이 허공의 사다리를 디디고 올라

씨앗들을 뿌려야 꽃의

새끼들이 먹먹하게 피어 오를까요

-시와 편견》 2021년 겨울호

-푸른시의 방》 재수록

-김조민이 만난 오늘의 시 (GBN 방송), 경북 신문에 게재(2022년 2월 10)

 

 

 

豫後

 

    박수현

 

 

  두 발을 부려두고 왔지요 칼과 가위의 고요도 놓고 왔습니다 눈과 얼음의 흰 바다를 유영하던 기억을 접어둔 채꼭 스무 날의 불면도 생각지 않기로 했지요 늘 북쪽으로부터 눈보라가 쳤습니다 내 몸의 기상도氣象圖 곳곳을 침략하며 발호하는 한랭전선 그랬어요 통증은 겨울자객처럼 다가와 내게 짐승의 자세를 취해보라고 집요하게 속삭였지요 나는 서랍 속 미제사건의 파일처럼 점점 어둠에 익숙해졌습니다  어느 손길이 내 전신인 흉터의 어둠을 위로할 수 있을까요 니들 홀더가 꿰맨 수술 자국에서 밤마다 물결치는 소리가 수도꼭지의 누수漏水처럼 새나왔습니다 갯지렁이들도 농게 새끼들도 슬개골을 따라 기어다닙니다 까마득히 몰려오는 파도가 휠체어에 앉은 내 어둠을 내습來襲하네요 나는 하얀 소용돌이 속에 처박히며 비명을 지릅니다 그리고 그저 폐선처럼 표류하고 있을 뿐입니다 아침이 오면 내 전신의 어둠은 어느 해안에서 좌초되어 있을까요

-시와 소금》 2021년 겨울호

명작순례 올해의 좋은 시 100/가림토

시인광장』 올해의 시 500선 선정

 

  

 

처녑

 

    박수현


여름나기로 단골 정육점에서 처녑을 샀다

소의 세 번째 위장인 처녑은

천 장의 잎새라는 뜻이랬다

검정 비닐봉지에 싸인 채 서너 근으로

갈무리된 전 생애의 중량

밀가루를 묻혀 아코디언 같은 주름을 치댄다

위장 하나 다스리는 일이

첩첩산중 만경창파를 이고 넘는 것 같다는데

어쩌자고 이 초식성 짐승은

깊고 어둔 위장을 네 개나 붙잡고 있는 걸까

쇠뜨기둑새풀의 독하고 푸른 숨결과

매미의 울창한 울음과

마지기 마지기 쏟는 작달비를 오래 되새김질 했겠다

질기고 무더웠던 여름날을 견뎌내느라

크고 순한 짐승의 위장 같은

울음의 겹 안에 들어가본 적이 있다

처녑 한 젓가락을 기름장에 찍는

적막한 허기의 저녁,

씹을수록 싱싱해지는 천 장의 이파리가

가망 없이 몸을 뒤집는다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0년 10월호)

-울산광역신문 2022년 11월 게재

문학뉴스》 (2021년 6월 10오늘의 시와 영상 게재

김조민의 [시읽는 고양이에 육성 낭송(2022년 1월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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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현 시인 약력

 

박수현경북 대구생

2003년 계간시지 시안으로 등단.

시집운문호 붕어찜 』 복사뼈를 만지다』 샌드페인팅』 

2011년 서울문화재단,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기금 수혜

제 4회 동천 문학상/2020년 수상

hyunbee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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