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를 쓸다 =박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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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를 쓸다
=박가경
손가락을 베이고 말았다
무를 위한 제의祭儀가 시작되는가
붉게 번지는 피는 경건하다
무 안을 떠돌던 바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히고 말았다
불가능한 일이다
바람의 옆구리를 잘라 낸다는 것은
접시는 끝내 진행형으로 남고
늘 베이는 건 검지의 끝
간격을 잘못 읽어 리듬이 흔들리고 말았다
잊었다고 생각한 것들이
붉게 살아 있다
칼날만큼 어긋나면 나는 행복했을까
나의 피는 무엇을 위한 의식일까
내일이 되어도 끝나지 않을 한낮의 제의는 계속되고 있다
다시 무를 썬다
간격의 간격을 자르고
내가 묻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생각한다
내일은 어떤 간격으로 돌아오는지
열리지 않는 괄호 속으로
자꾸만 스며드는 통증으로
나는 나를 펼쳐 두고
알맞은 간격으로 지워지는 중이다
시작시인선 0387 박가경시집 우리 사이에는 우리가 모르는 계절이 살고 있다 22-23p
얼띤感想文
화자는 무를 쓸지만, 사실 무가 화자를 쓸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친 손가락 지指에서 피가 붉게 퍼지는 지紙로 가는 행사, 그 과정은 마치 제의祭儀와 같다. 시인께서는 제사를 치르는 의식으로 얘기했지만 이도 제의提議를 내놓은 것과 마찬가지겠다. 무務에서 무를 쓸며 무無를 비춰보는 제의提議에 제祭의 의식, 그건 마음을 수양하는 일이다. 무 안을 떠돌던 바람이 빠져나가지 못하고 갇히고 말았다. 본시 그곳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무슨 바람이 있었을까? 내가 무를 쓴 건 무를 먹기 위함, 무의 역할은 한 끼 식사를 위해 제공된 하나의 몸뚱어리다. 내가 너를 먹고 네가 나를 먹는 돌고 도는 순환론에서 접시는 끝내 진행형으로 남고 검지의 끝 발아에 다만 거리를 재 본다. 무에서 피어나는 것 골목을 거닐다가 붉게 오르는 것은 무엇인가? 홍어다. 어긋난 칼날만 아니었다면 바다를 유유했을 터 단칼에 뿜은 피는 내일을 위한 제의였던가. 다시 무를 썬다. 애초 아무것도 없는 곳에 내일을 생각하며 쓰는 일 그건 현실을 지우기 위한 제의와도 같다. 무를 쓴다는 건 오십만 년 전 노을 쥔 한 남자가 뭉게구름을 들고 뜬금없이 후려친 면상이었다. 도마는 쓴 무 다 털어내고도 끓일 뭇국 하나 없이 밥 한 그릇 종이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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