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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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이라도 보고 와야겠어
=김소연
얼굴,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얼굴, 걱정밖에 안 남은 얼굴,
천근만근 무거운 얼굴, 모가지가 두 개는 되어야
겨우 버틸 수 있는 얼굴, 타인에게도
슬픔이 있다는 것을 다 잊어버린
얼굴, 기억하던 그 얼굴은 간데없고
기억해주길 바라는 어리광이 서린 얼굴
침대에 나뒹구는 얼굴, 솜으로 채워진 얼굴, 얼굴을 베고 잠든 베개,
자그마한 구명보트가 이마에 정박해 있는
얼굴, 두 손을 가슴에 올리고 심장의 박동을 느낄 때
오늘도 실패했구나 생각하며 경련이 이는 얼굴,
빗물받이처럼 두 귀가
쇠구슬 같은 눈물을 모으는
얼굴, 보고 있는 것들이 모조리 통과되고 있는
얼굴, 골똘히 잠든 얼굴,
약간의 근육운동이 약간의 희로애락이
미미하게 정차하다
떠나는 얼굴, 뒤통수 뒤로 숨는
얼굴, 머리카락을 꼭 붙들고 놓지 않는 얼굴
입을 약간 벌려 말을 거는 얼굴에게
얼굴을 갖다 대고 귀를 기울이면
더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숨을 뱉는
맹세를 놓아줌으로써
평생 동안 꾸던 꿈에서 비로소 깨어나 잠시 웃는
얼굴, 완벽한 잠으로 접어드는 얼굴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64-65p
얼띤感想文
중국 어느 예술가가 떠오른다. 우는 얼굴만 그렸던 예술가였다. 통통한 얼굴에 맑은 눈물, 반면에 웃는 얼굴로 화제를 모았던 예술가 우리나라 이순구 선생도 있었다. 누이의 죽음에 충격을 받고 그린 얼굴, 절규 에르바르도 뭉크가 있었던가 하면 더는 세상의 얘기를 듣기 싫었는지도 모르겠다. 한쪽 귀를 잘라야만 했던 고흐도 있었다. 세세한 수염이 촘촘하고도 덥수룩한 얼굴 윤두서의 자화상이 있었든가 하면 각종 마약에 찌든 얼굴만 그렸던 미국의 어느 화가도 있었다. 가난했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예술로 가난을 극복하려고 했던 예술가들, 주어진 삶은 그리 넉넉지 못했다. 그런 얼굴이 지나간다. 두려움이 토끼처럼 뛰어다니는 얼굴, 어딘가 모르게 쫓기는 마음과 어딘지는 모르지만 숨어야 할 것만 같은 삶의 연장은 오십에서 오고 눈길이 너무 멀리 가버려 눈빛을 가질 수 없는 이미 벌어진 사회적 격차에 이를 극복하고자 쌓은 지식은 이미 쇠퇴한 지팡이나 다름이 없다. 천근만근 무거움으로 하늘에 뿌리를 두며 사는 현대의 낑깡족 나에게도 모가지가 있었던가, 여러 번 자해만 강요받았던 거울 앞에서 그간 묶은 때를 벗기고 또 벗기다가 드디어 터져버린 빗물받이, 거기에 두 손만 자꾸 걸어둔다. 무엇이었을까? 하루를 온전히 담을 수 있는 그릇은 무엇이었을까? 오늘도 실패한 얼굴에 나는 무엇을 더 기대하며 회색빛 바닥에 앉아 있는 걸까? 핏빛 구름과 요동치는 물결 속 우리의 일그러진 얼굴 속에는 무엇으로 채워져 있는가? 아니 무엇을 비워야 하는가? 푸른 하늘을 보며 한 점 부끄러움이 없는 바닥, 바닥을 기는 요사처럼 능사가 되는 일 저 바닥을 치고 오르는 것은 없는 것인가! 오늘도 나락으로 간 건질 수 없는 침울한 한 세계를 들여다보며 완벽하게 세모로 접고 접어두고 뒤돌아선 얼굴이 있었다는 것에 적잖이 부끄러운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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