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아귀 =강 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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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아귀
=강 정
다 읽은 책들을 팔아 일용할 채소를 사 들고 오니 방이 더 커져 있다 내 몸도 체구는 그대로이나 속이 넓어져 있다
책 무더기 빠져나간 자리가 설핏 누가 오래 살다 간 동굴 같다 싶은 순간, 그 안에 곰인지 호랑이인지 모를 검은 덩어리 하나 꿈틀댄다 미처 읽어내지 못한 글자들의 뒤태인가 싶은 순간, 덩어리가 둘로 갈라져 하나는 덩치 큰 새가 되어 남의 집 숨은 곳간 들여다보는 내 눈을 쪼고, 또 하나는 느릿느릿 꾸물대며 몸을 푸는 구렁이 되어 놀란 입속에 알을 슨다
이것은 태기인가 화기인가
갑자기 복통이 아리며 저것들 똬리 튼 속이 마치 내 뱃속처럼 환하고 낯설다 사다놓은 오이, 호박, 가지 등속이 순식간에 쭈글쭈글 연기 피우며 사라지고 식탁 위엔 내 머리통이 윗뚜껑 열린 채로 오색 만발 음식들을 그릇처럼 떠받들고 있다
남아 있는 책들이 우르르 몰려내려와 음식들을 먹어댄다
머리 사라진 내 몸통이 네발로 기며 새와 구렁이 숨어 있던 굴속으로 사라지니 음식 다 털어낸 머리통이 다시, 저편 내 방에서 이편 암흑 속에 시선을 꽂는다
눈망울이 돌처럼 굴러들어오고 혀가 밧줄처럼 몸을 꿰어 굴 밖으로 끌어내니 창가에 주렴처럼 형태를 빚어 매달아놓은 구름이 문득 지구의 마지막 형해 같다
목 잘려 뻥 뚫린 구멍에서 사람 머리 다섯 개가 솟았다
커튼을 열고 하늘에 내려온 곰과 호랑이가 그것들 뜯어 먹어 지구는 곧 마름모가 될 터, 모든 게 몸안 물질들이 주기율표 배반하며 서로 맞질러 뿜어낸 전류 탓이었을 거다
문학동네시인선 211 강 정 시집 웃어라, 용!
얼띤感想文
시를 읽는 것, 차라리 독해라고 하면 이상할 것 같다. 혼자서만 입을 해害(獨害)를 여러 사람까지 도로 버려 놓는 일 그러나 어디까지나 이건 옹기(안을 옹擁) 하나 건지려는 붓의 놀림과 같다. 역사시대와 선사시대의 구분은 붓의 역할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하는 문화재 발굴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은 이견이 없을 것이다. 가령 각종 천문기록이나 땅밑 유물은 기록을 확인시켜주기 때문이다. 발굴發掘과 발골拔骨의 차이. 시는 역시 발굴보다는 발골에 더 가깝다. 뼈에 새긴 이상한 문자를 붓으로 탈탈 털어 보는 일 거기서 어떤 문화를 그렸는지 알아내는 과정은 긴 역사에서 마치 어느 발자취의 행적을 분석하는 것처럼 시원한 바람을 몰고 오기도 한다. 이는 과오보다는 정오에 더 가까운 학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시제 ‘책의 아귀’다. 여기서 책의 정의가 우선 필요하다. 시에서는 몇 가지를 제시한다. 종이를 여러 장 묶은 물건이라는 책冊과 잘못을 꾸짖거나 나무라는 책責, 말뚝으로 만든 우리나 울타리 책柵, 정치에 관한 어떤 계책 따위 책策이 있다. 다 읽은 책들을 팔아 일용할 채소를 샀다. 그러더니 방이 더 커졌고 몸은 그대로나 속 넓어졌다. 여기서는 문책問責이다. 채소는 푸성귀 채소菜蔬보다는 채소綵素에 더 가깝다. 비단이나 무늬 채綵 희다 본 생명수 한 빛깔의 무늬가 없는 소素다. 책 무더기 빠져나간 자리가 설핏 누가 오래 살다 간 동굴 같다. 여기서도 물론 문책問責이지만 빠져나간 자리는 마치 목책木柵 하나 쑥 둘러 뺀 것처럼 닿는다. 그러니까 마치 동굴처럼 구멍이 생긴 거로 묘사하고 그 안에서 곰과 호랑이와 같은 동물적 심성을 그려 넣은 것이다. 그러나 시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여기서 발한 어떤 물질로 전환한다. 새와 구렁이다. 새는 내 눈을 쪼고 있고 또 하나는 구렁이처럼 알을 슨다. 뱀을 넣는 이유가 있다. 화사첨족畫蛇添足이라 해서 사족蛇足이다.
시 2연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신화적인 냄새가 오롯하다. 곰과 호랑이는 단군신화에서 북방문화를 접한 것 같고 새와 알은 신라나 가야 세력의 어떤 느낌 같은 것으로 남방문화를 보는 것 같다. 여기서 뱀까지 나오니 창세기까지 뭐 그렇다는 얘기다. 어차피 시는 처음을 알리고자 하는 마음 始니까.
이것은 태기인가 화기인가? 묻는다. 아이를 갖는 어미의 마음 혹은 가슴이 번거롭고 답답한 마음일까. 복통은 복부에 일어나는 통증도 있지만 밥통(腹桶)이란 뜻도 있다. 시를 읽는데 배가 아플 일은 없겠고 경전 같은 온전한 밥그릇이 깨지는 일이니 얼추 이해가 선다. 오이吾異는 나와 다른 것, 지질시대의 광물질 호박琥珀 가지는 어느 한 갈래를 뜻하는 것으로 지류 파派겠다. 오색 만발이란 시의 다의성을 말한다.
머리 사라진 내 몸통이 네발로 기며 새와 구렁이 숨어 있던 굴속으로 사라지니 음식 다 털어낸 머리통이 다시, 저편 내 방에서 이편 암흑 속에 시선을 꽂는다. 그러니까 시의 요지는 어딘가 빼먹고 없고 오해만 가득한 것들로 굴러다니다가 저쪽 그러니까 물 건너 머리통 즉 시의 핵심은 드러나지도 않은 채 이쪽만 바라보고 있으니 암담하기 그지없는 꼴이다. 그러니 암흑이나 다름이 없겠다.
눈망울이 돌처럼 굴러들어오고 혀가 밧줄처럼 몸을 꿰어 굴 밖으로 끌어내니 창가에 주렴처럼 형태를 빚어 매달아 놓은 구름이 문득 지구의 마지막 형해 같다. 형해形骸는 사람의 몸과 뼈다. 이 구절을 가만히 읽고 있으면 무슨 조선 시대 아니 고려 시대 아니 사마천 사기에 나오는 어떤 형벌처럼 다루는 얘기를 읽는 것 같다. 고대사회의 형벌은 글로 쓰기에 마뜩잖을 정도로 처참했다. 지금 북의 행태를 보면 고대사회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볼 때 분단된 우리 민족의 불행 중 하나라 여긴다. 그러니까 해석하자면 시의 맹아萌芽는 어디로 갔는지 없고 그것처럼 얼추 비슷하게 꿴 것이 널려 있으니 시인이 보기에도 이건 아니다 싶다 뭐 이런 말이 된다.
목 잘려 뻥 뚫린 구멍에서 사람 머리 다섯 개가 솟았다. 이 대목에서 갑자기 이차돈이 지나간다. 흰 피가 솟구쳤다고 했다. 물론 신라 법흥왕의 불교를 공인하기 위한 이차돈과의 사전 모략이라는 것은 잘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때 신라의 부족이 몇 개였지. 이 씨, 김 씨, 박 씨, 석 씨 하고 몇 있었는데 말이다. 그러니까 시의 진화 혹은 분화에서 빚은 시의 다의성 여러 해석하기 나름이겠다. 다섯 개, 왜 다섯 개라는 표현을 했을까? 숫자 五에서 바르게 사는 나의 오吾에서 더욱더 멀어져 간 오지의 오奧다.
마름모 네 변의 길이가 같고, 두 쌍의 마주 보는 변이 서로 평행하며, 두 대각선이 중점에서 서로 수직으로 만나는 사각형, 이건 아니고 다 마른 모模 어떠한 문채 모양을 이룬다는 말이다. 주기율표 사물을 기록하는 일 그것을 우리는 주기注記라 한다. 흔히 절에서 쓰는 용어다. 논리적으로 맞지 않은 일 즉 모순에 가깝다는 배반背反이다. 서로 맞질러 뿜어낸 전류 탓이었을 거다. 전류轉流 조류가 흐르는 방향을 바꾸는 일로 역모에 가까운 자전이라 할 수 있겠다. 아니 시니까 역모보다는 혁명이 나을까? 여기서 갑자기 체 게바라 좋아하는 시인 박정대가 얼핏 지나가네. 에휴 막걸리 한 잔 마시려나.
아무래도 동동주가 낫겠지 시인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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