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전체적인 내용은 바다를 갈망한 할망구에 시러 펴디 못한 외봉낙타에다가 얹은 불어다. 그것은 맹아에 닿지 못한 끝없이 펼쳐놓은 어떤 어족에 대한 묘사다. 월정리와 평대리는 지면을 상징한다. 홍대 앞 거리라 했으니까 인파로 이룬 자의 거리를 상징한다. 바다는 언어의 본고장이며 원천지로 바탕을 이룬다. 연인은 시 객체로 아직 시가 뭔지 모르는 인파 중 여기에 닿은 사람이고 뷰파인더와 셀카봉은 외래어로 웬 낯설기, 교감의 행위적 묘사다. 팔순 할망은 자 중에서 저녁을 몰 수 있는 별에 가깝다면 지나친 말일까! 팔순은 굳이 한자로 쓴다면 팔순八巡이 맞지 않을까 싶다. 돌 순巡 순방하다의 이쪽 저쪽의 교감 정도를 밝혀 본다. 팔은 여러 갈래를 상징한다. 주름 깊고 검푸른 얼굴은 지면에 그려진 윤곽을 상징한다. 이는 홍해처럼 갈라지는 인파로 번져나감을 볼 수 있다. 물론 자가 자들로 이루었지만 희멀끔했다. 표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어떤 뜻을 이루지 못함을 묘사한다. 이는 매일매일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까지 하고 거대한 미역 짐은 아예 외봉낙타의 혹이었다고 한다. 미역은 미역未譯이거나 미역未疫인데 어느 쪽으로 읽어도 무관할 듯싶고 외봉낙타가 아니라 쌍봉낙타여야 함을 알 수 있다. 시의 다의성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낮게 흔들리는 걸음의 리듬은 메트로놈처럼 빈틈이 없다. 자의 걸음이다. 메트로놈은 악곡의 박절을 측정하거나 템포를 나타내는 기구다. 그러니까 똑딱똑딱 규칙적인 모습에 학을 뗀다. 정확한 각도로 굳은 허리는 짐짓 무덤이 솟은 뒤에도 펴지 않을 것이다. 낫 놓고 기역 자다. 이런 말인데 시는 곧음을 지향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무언가 펼 수 있는 생각의 다각도를 추구하기 때문에 낫 놓고 기역 자로 눕는 행위는 삼가야 한다. 걸음마 뗀 관광객 아기를 피하느라 기우뚱할라치면 파도가 조금 더 소리를 높여 끌어당겼다. 아기도 물론 지면에 닿은 자다. 파도는 완벽성의 본고장 즉 바다의 행위적 묘사다. 어느 한 세계에서 피안으로 당기는 역할이다. 바람은 바닥 쪽으로 세게 불어가 부축했다. 분다는 것에서 불어는 아닐 것이다. 불어는 맹어가 되지 못한 물고기의 한 종류다. 지고 가는 것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자들의 모임은 가관이었다. 미역과 파도가 할망을 안고 가고 있었다. 어중이떠중이 다 싸잡아 도는 어족이었다. 어처구니없는 일은 늘 같은 시간에 동행하며 순하게 걷다가 머물다가 또 누군가에게로 기쁘게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 이만한 팔푼이도 없을 것이다. 왜 같은 시간이라 했을까? 그 경계는 죽음을 본다. 피안으로 넘어가는 순간 다른 세계로 닿는 똑딱똑딱 문 두드리며 열 때 시간은 바뀐 것이 되니까, 사랑의 블랙홀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