털모자의 보풀을 떼어내는 20분 =김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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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모자의 보풀을 떼어내는 20분
=김은지
만나는 사람들이 생태주의 이야기를 계속해서 저절로 알게 되는 것들이 많다 겨울에 한참 쓰던 모자를 보풀 때문에 내놓으려고 하다가 가위질을 시작했다 재밌다 무슨무슨 주의를 붙이는 것 그저 궁금한 걸 물었다가 꾸중을 듣곤 했었는데 이 작은 모자에 보풀이 이리도 많다니 가위가 내는 고유한 소리는 사실주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일 년 더 쓰고 다닐까 어울리는 모자니까 말이야 울이나 그런 건 아니지만 따뜻하고 훌륭한 모자니까 말이야 다 읽지 못한 책을 꽂아둔 칸에는 낡은 것들의 힘이 있고 그 책을 사서 조금 읽었을 때 나는 허름한 옷을 영원히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털장갑의 보풀도 제거해야지 손등 부분 방울방울 뜨개질 기술 형식주의자들이 칭찬할 것 같다 –사기꾼이 제일 좋아하는 건 죄책감이래요 주의해서 마음에 드는 옷을 입고 다니며 시간의 보풀을 제거하고 이 잘 만든 장갑을 계속 쓸 거다 잊어버리지만 않으면
얼띤感想文
확실히 세상은 많이 변한 것 같다. 아날로그에서 디지털시대로 밥과 김치만으로도 해결이 되었던 시절이 있었던가 하면 요즘은 먹거리조차 크게 신경 쓰지는 않은 거 같다. 그만큼 다양하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간격도 예전보다는 훨씬 가까워졌고 좁아졌다. 세계인이 한눈에 볼 수 있는 시대다. 오늘은 또 무엇이 올라와 있을까? 그 궁금증과 관심은 우리의 젊은이들만이 갖는 것도 아닌 이 시대에 결혼이라는 건 고리타분한 옛 시대의 유물처럼 느껴진다. 마음 맞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살아보는 것도 괜찮은 시대, 아니면 애완동물을 두든가, 사랑마저도 AI가 처리하는 시대니까 호호 이에 뒤질세라 엔비디아 주가는 고공을 모르고 행진한다.
물론 시에서 다룬 이야기는 이와 같은 건 아니지만, 읽고 무심코 떠오른 생각들이다. 시인께서 써놓은 시어를 보면, 가만히 생각하면 참 재밌다. 몇 가지만 본다. 우선 생태주의, 생물의 살아가는 모양이나 상태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과 행동의 원칙이다. 동태, 명태, 황태 같은 것이 떠올랐다. 겨울에 한참 쓰던 모자를 보풀 때문에, 겨울과 모자가 대치되는 상황이다. 겨울이 불변이라면 모자는 가변적이다. 가위질 또한 불변적인 요소로 여성상을 떠올리게 한다. 가위가 내는 고유한 소리는 사실주의 소설들을 떠올리게 한다. 다 읽지 못한 책을 꽂아둔 칸, 칸은 마음의 한 공간이다. 허름한 옷을 영원히 입는 사람이 되고 싶었지만, 사실은 그렇지 못하다. 털모자에서 털장갑으로 이행한다. 죄책감 같은 것은 잊은 지 오래다. 한동안은 장갑을 끼고 다닐 거 같다. 겨울은 추우니까,
내 머문 공간 서재를 본다. 칸칸 꽂혀 있는 등들 참 많다. 아무거나 하나 끄집어내어 읽는다. 아직도 아날로그적인 상황, 공간은 깔끔하고 간소화되어야 한다. 하나씩 더 느는 등에 결혼처럼 끼고 사는 나, 이제는 버릴 때도 되었는데 여전히 먼저 가신 누님께서 그려주신 웃는 얼굴만 저리 환하게 웃고 있다.
문학동네시인선 193 김은지 시집 여름 외투 030-03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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