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을 빌리러 온 사람 =김이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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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을 빌리러 온 사람
=김이듬
그는 가족과 연락이 끊겼지만 관계 단절을 증명 못해 기초 수급 혜택도 못 받는다
그는 반지하 단칸방에 산다
그는 옥탑 단칸방에 산다
그는 절벽에 서식한다
그는 밥 대신 술과 약을 먹는다
절망이 주식이다
그는 일용직 노동자다
그는 작가다
지저분한 밤의 골목 끝이었다 수거함이 있었다 사람들이 피해 가는 구석이었다 그는 나를 누나라고 불렀다 세상이 무섭다고 했다 그의 조난신호를 나는 분진처럼 털어냈다 오래전이었다 이후에 그를 볼 수 없었다 토막난 소문들이 흩어졌다 단박에 내가 그를 판단한 잘못은 마음의 층리로 가파르다 시간이 실어가지 않는다
얼띤感想文
불은 한 모금의 희망 같은 것이겠다. ‘번쩍’ 거릴 때 순간 오는 현실의 탈피 같은 것이겠다. 현실의 탈피는 곧 죽음이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게 없다면 가족이든 기초생활 수급이든 반지하든 옥탑이든 하물며 절벽에라도 괜찮다. 절망의 극치에서 오는 한 줄기 섬광 같은 희망, 그 불을 댕기고 싶다.
그렇다면 희망은 무엇일까? 그 희망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 단절된 가족이 아니라 기초 수급자가 아니라 따뜻한 가족의 손길에 연금의 혜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누나가 아니라 나, 똑바로 눈을 뜨고 바라보는 현실이겠다. 단박에 내가 그를 판단한 잘못은 마음의 층리로 가파르다. 하나의 예시다. 시간은 벌써 시속 50이 넘었고 도로는 더욱 거칠다.
시속 80과 함께 한 오늘, 차 안에서는 보릿고개가 나오고 흥이 아니었던 시절을 상기하며 흥으로 닿는 지금 짐작할 수 없는 숲의 하루가 밤의 골목으로 내몰린 것만 같다. 분진처럼 다가오는 조난신호에 문어처럼 내 감각을 깎을 뿐이다.
문학동네시인선 204 김이듬 시집 투명한 것과 없는 것 0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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