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김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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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김소연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현관문을 열고 운동화를 벗던 그 순간에. 가방을 책상 옆에 두고 옷을 갈아입고 세면대 앞에 서서 화장을 지우는 순간에. 나는 i가 되어갔다. i처럼 살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많았지만 i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 i의 표정을 좋아했고 i의 살랑거리는 뒷모습을 좋아했지만 i가 되고 싶은 적은 없었다. i가 되었는데 저녁밥으로 비빔국수에 삶은 계란을 올려도 될까. 얼음을 넣어도 될까. 나는 i가 되었는데 좀비가 나오는 미드를 보아도 될까. 나는 i가 되었지만 i를 잘 알지만 i 답지 않아도 될까. 나는 i니까 지금 i의 생각을 내가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밤에 아이스커피를 마시면서. 영화 속의 노파가 하는 말에 내 마음이 미어질 때에. 눈을 감고 누워 있다가 잠의 길목에서 얼핏 새 한 마리가 보일 때에. 새는 i의 목소리로 말을 하고 내 목소리가 저랬단 말이야, 나도 새의 목소리로 웅얼거릴 때에.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모를 냄새가 코끝을 스칠 때에. 그 냄새에 아문 기억이 퍼뜩퍼뜩 날아오를 때에. 누군가 i의 안부를 묻는 문자를 보내왔다. 답장은 뭐라고 보내야 하지? 토마토를 먹고 있다고 말하면 어떨까. i는 내 앞에 서서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며 씨익 웃었다.
얼띤感想文
시를 바라보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것을 시인은 i라 했지만, i는 신적인 존재임에는 틀림없는 거 같다. 나는 언제부터 i가 제대로 보였을까? 그것을 빗대어 내 하는 일을 생각하고 내 또 다른 일에 대하여 까마득한 세월을 보태어 본다. 정말, 시간은 무수히 흘렀는데 마음은 i처럼 i와 같이 변함이 없었지만, 몸은 이제 한 풀 꺾는 나이가 되었다. 앞으로 살날을 생각하자니, i처럼 되는 건 무작정 욕심일 거 같아도 어차피 산목숨 도전은 있어야겠다. 그러므로 지문을 찍고 문을 열며 들어와 자세를 고정한다. 순간, i가 바라본다. 오늘도 파도처럼 위험한 고개를 넘고 울렁거리는 멀미에 i가 보았을 법한 자리에서 드립 한 잔을 친다. i는 계속 도는데 할 말을 잃었는지 자꾸 삐그덕거린다. 골목은 오토바이 소리로 야 마 시끄럽다 그러는데 나는 딸딸 거린다. 난데없이 고향 친구 전화 오더니 i를 세우는데 약이 괜찮아, 그러니까 약발이지 뭐. 좋은 약 있으면 소개 좀 해줘 난 절실하다고, 락앤락에 넣어놓은 두부가 상하고 한 끼 밥조차 먹지 않은 시각, 가 i이 말이다 뭐하노? 응 걔 일 그만뒀어, 지금 뭐하는데? 자기 일 하겠지 뭐. 근데 살 마이 쪘더라, 우리 대학 다닐 때와는 완전 달라. 야 그 얘기 그만하고 i제 뭐 짠 얘기 좀 해? 아냐 그냥 웃자고 한 거야. 비쩍 마른 i 하나가 한고비 너머 깔깔 웃음은 그치지 않았다.
시인께서 써놓은 시어 ‘미드’는 미국 드라마 줄임말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89 김소연 시집 촉진하는 밤 38~3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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