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놀/이명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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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50223』
저녁놀/이명윤
부고 소식에 모처럼 만난 네 명이
석고상처럼 무뚝뚝 앉아 있었고
2차선 국도를 따라 하루해가 빠르게 지고 있었다
배고프다,
최초에 누구의 입에서 그 순결한 말이
흘러나왔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일행은 그때부터 두 시간 후면 만날
식단에 대하여 진지한 토론을 시작했다
음식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잇는
이 별의 오래된 의식이어서
대화는 차창 밖에 걸린 검붉은 노을 같았고
식어도 휘휘 저으면 다시
눈빛이 살아나는 육개장 같았다
우리는 산처럼 들판처럼 끝없는 허기를 느꼈고
식도처럼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날 땐
룸미러에 공허하게 떠 있는 서로의 웃음과
눈이 마주치기도 하였다
지루한 식욕을 끝낸 고인을 향해
불빛은 바퀴를 굴리며 정처 없이 흘러갔고
눈이 침침해질 무렵 나는 허리를 펴며
천천히 슬픔의 속도를 줄여 나갔다
그리고 하나둘
창가에 기대어 잠든 쓸쓸한 귀들에게
애피타이저 같은 음악을 한 모금씩
느리게 흘려주었다
보름달이 떠 있었고 정확히,
삼십 분 전이었다
-월간「한국산문」 2025년 1월호, 이달의 시
(시감상)
부고와 장례, 장례식장. 나이 들수록 많아지는 것이 부고장이다. 산다는 것은 죽음을 동반하는 것이라지만 쉽게 동의하기 어려운 것이 그것이다. 아니, 안 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시인이 묘사한 것처럼, 비유의 소재로 삼은 저녁놀과 육개장과 애피타이저 같은 음악, 그 모든 한 귀퉁이에 묻어있는 ‘고인’이라는 말의 의미가 흠결 없는 판결문 같은 생각이 든다. 여전히 배는 고프고 누군가의 장례식장은 가까워지고 더불어 삶은 강물처럼 낮은 곳으로 밀려나기만 한다. 의식과 예식과 간 사람과 남은 사람과 저녁놀의 무게는 같다. (글/ 김부회 시인, 평론가)
이명윤 프로필
경남 통영, 전태일문학상 외 다수 수상, 시집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이것은 농담에 가깝습니다)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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