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보도 앞에서 =문보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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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단보도 앞에서
=문보영
애인과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다. “나 방금 영감이 떠올랐어.” 나는 옆에 있는 안경점을 보며 말했다. “뭔데?” 애인이 물었다. “세상의 모든 가방이 트렁크인 거야. 다른 형태는 없어. 지난번에 여기 같이 서 있을 때, 저 안경원에 들어가던 사람 있잖아. 안경점 밖에 캐리어를 덩그러니 두고 들어갔던 거 기억나? 갑자기 그게 떠올랐어.” “그 트렁크가 우리 것도 아닌데 괜히 우리가 불안했잖아.” 애인은 웃으며 화답했다. “방금 머릿속에서 쓴 시에서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트렁크를 들고 다녀. 출퇴근길에도 트렁크를 들고 다니고, 등산을 갈 때도, 수영장에 갈 때도, 강아지를 산책시킬 때도 트렁크를 들고 다녀. 그 세계에는 주머니라는 개념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작은 짐을 들더라도 트렁크가 필요해.” “오…….” 신호등 불빛은 여전히 빨간 불이었다. 우리가 헤어지는 곳은 늘 이 앞이다. 나는 애인을 이곳까지 바래다주며, 그가 횡단보도를 다 건널 때까지 손을 흔든다. 헤어지는 곳이기 때문에 관찰할 거리가 많았고, 그 덕에 나는 기괴한 시도 쓸 수 있었다. “아, 결혼식 갈 때랑 장례식장 갈 때도 트렁크를 들고 가야 돼. 검은색이어야 하고. 그건 기본이지.” 신호등 불빛이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그런데 그런 세상을 왜 만드는 거야?” 애인이 물었다. “뭐긴 뭐야, 세상의 평화를 위해서지.” 나는 말하며 신호등을 가리켰다. 애인은 다음 데이트도 기대된다고 말하며 미소 짓고는 꼬리 달린 동물처럼 횡단보도를 건너갔다. 오늘도 애인을 보내주었다.
*《문장 웹진》 2022년 10월호
얼띤感想文
트렁크가 트렁크를 보며 트렁크 앞에 서 있다. 영감을 떠올리기 위해서, 영감靈感은 신의 계시나 느낌 혹은 예감 같은 것이었다. 창조적인 일의 그 서막을 알리는 행위, 주술적인 것도 영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선사시대는 이를 관장하는 제사장이 있었다. 그를 단군이라고도 했던 시대가 있었다. 해가 떠오르며 그 해가 나무에 걸쳐 빛나 보일 때가 가장 신적인 예시를 받을 수 있는 적절한 시기로 알았다. 흰 자작나무, 그리고 둥실둥실 떠오른 해, 天孫降臨, 그래서 우리는 까치둥지를 허술하게 보지 않았다. 까치집은 해의 둥지처럼 여겨 무언가 올 것 같은 느낌, 창조적인 일의 그 서막을 알리는 행위로 말이다. 세상은 해가 떠 있어도 늘 깜깜했고 그 깜깜함 속에 늘 불안했다. 하나는 동쪽 하나는 서쪽에 머물면서 그 서쪽은 늘 안주하며 쇠퇴의 기운이 있었다면 동쪽은 새 왕조의 융기 즉, 반역이나 적을 예감하듯 어떤 불안한 마음을 안정시키기 위해 점을 보았다. 껍질이 흰 자작나무 아래서,
트렁크는 애인이었다. 애인처럼 늘 바라보며 대화를 한다. 그러나 트렁크는 입도 뻥긋하지 않는다. 다만, 붉은 신호등 앞에서 함께 마주 보며 서 있을 뿐이다. 아무런 말이 없는 트렁크는 무슨 생각을 할까? 저 트렁크를 바라보며 다만, 신호등이 빨리 바뀌길 바라는 마음일 뿐이겠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계가 아니라 마음의 열쇠이기 때문이다. 마음을 열 수 있다면 전쟁 같은 것은 없을 것이다. 소통의 단절, 트렁크는 왼손 또 다른 트렁크는 하나의 강을 끼고 오른손만 내밀고 있을 뿐이다. 애인 즉 트렁크는 하루의 해처럼 떠올라 식당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카페에 갈 때도 따라다니며 보아달라고 조른다. 신호등 불빛은 여전히 빨간불, 일과를 마치고 드디어 밝게 마주한 트렁크, 트렁크를 뚫어지게 바라본다. 흰 자작나무의 손짓은 동물처럼 밝게 웃고 있었다. 순간 신호등은 초록빛으로 바뀌었다. 애인의 마음을 알았으므로 애인은 이미 바뀐 신호등을 바라보며 건너가는 애인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다음 애인은 어떤 트렁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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