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송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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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송재학
나뭇잎과 물고기가 겹치던 때보다 훨씬 뒷날, 사람과 나무가 윤곽 없이 생을 이룬 시절이 있었다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돋아 나오고 사람은 나무 속에서 죄를 고백했다 나무와 사람은 결이라는 고운 이음매가 있었다 나무의 별자리가 사람의 그림자에도 스몄던 화석이 나왔다 점차 사람이 이목구비라는 예의를 갖추고, 나무는 잎을 매달면서 이진법이 시작되었다 나뭇가지 점(占)은 사람과 나무의 간격에 대한 예언이다 나무가 사람을 그리워할 때 사람도 두 팔 벌리고 나무의 불 켜진 지층이 보고 싶었던 날짜는 구석기 이전이라는 짐작만 있을 뿐,
지금 나무가 비어 있다
얼띤感想文
내가 존경하는 詩人 중 한 분이다. 송재학 선생의 詩 ‘나무가 비어 있다는 말을 들었다’ 감상한다. 사실 선생의 시를 읽는다는 건 굉장한 도전인 거 같다. 어떤 때는 무슨 말인지 도무지 알 수 없을 때가 종종 있다. ‘비어’라는 시어는 필자도 한 번 써 본 적 있기에 비교적 읽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은 거 같다.
이 詩는 하나의 독백이다. 나뭇잎은 가상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많은 것 중의 하나를 상징하며 물고기(魚=語)는 역시 언어를 상징한다. 사람과 나무는 한 사람으로 현실과 가상의 세계를 오간다. 그러므로 나무는 사람으로부터 돋아 나오고 사람은 나무속에서 죄를 고백한다. 이를 다시 말하면, 시는 사람이 쓰는 것이고 사람은 시를 통해서 하루를 반성한다는 말이다. 나무와 사람은 결이라는 고운 이음매가 있었다. 시와 사람은 결(바탕의 상태나 무늬)로 연관성을 맺으며 이어간다. 나무의 별자리가 사람의 그림자에도 스몄던 화석이 나왔다. 여기서 나무는 시인의 가상 세계 쪽 본인을 제유한 것으로 별자리(詩) 즉, 다른 시인의 시를 읽고 사람의 그림자에도 스몄던 화석이 나왔다. 그러니까 사람은 현실 세계의 본인을 제유한다. 화석 같은 시를 낚기 위한 시적 활동인 셈이다.
사람이 이목구비라는 예의를 갖추고, 나무는 잎을 매달면서 이진법이 시작되었다. 사람은 시적 활동에 대한 모양을 갖추는 것으로 이목구비의 예의를 갖추는 것으로 묘사했다. 즉 얼굴을 형성한다. 글이란, 한 편으로는 상대에게 보이는 시인의 얼굴이다. 나무는 잎을 매달면서 즉 시를 씀으로써 이진법이 시작된다. 이진법은 질의와 응답의 과정 너와 나 물론 나와 내 안의 또 다른 나다. 그 과정을 거치는 행위는 시의 완벽성으로 나아가기 위함이겠다.
나뭇가지는 나무에서 빚은 한 갈래의 모작 같은 작품을 은유한 것이겠고 간격은 이게 시가 되나 하며 바라본 거리, 그것을 추적해 보는 일이겠다. 그러므로 예언한다고 묘사한다. 나무가 사람을 그리워할 때 사람도 두 팔 벌리고 나무의 불 켜진 지층이 보고 싶었던 날짜는 구석기 이전이라고 짐작한다. 달리 말하면 시가 그리울 땐 시를 본다는 말이겠고 그 날짜는 구체를 즉, 詩 쓰는 행위 이전으로 짐작한다는 말이다. 물론 이렇게 짐작하는 이유는 시인 말고도 다른 쪽 부류의 사람 또한 詩를 읽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구석기는 구석기舊石器가 아니라 구석기球石記로 표기한 거로 보면 된다. 줄여 球體다. 바닥에 튀어 오르는 물방울을 생각한다면,
지금 나무가 비어 있다. 이처럼 나뭇잎 하나 떨구어 놓기까지 했으니 깨끗이 비운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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