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에게 공장을 돌리게 하자 =신형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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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에게 공장을 돌리게 하자
=신형목
검은 그림자 같다. 짙어지는 어둠 같다. 투명한 밤 같다. 편의점 간판과 유리창, 좁은 화단을 타고 저 끝까지 길게 흐르며 횡단보도 앞에 귀가자를 세워놓은 저녁 신호등처럼 비는, 겨울 공터에 눈사람을 세워놓고 봄 끝까지 길게 흘러온 것 같다. 저녁 그림자처럼 긴 하루의 끝까지 흐르는 사람, 터벅터벅, 걸으면 신호등은 금방 깜빡거리고 잠시 푸르게 물든 사람이다가 꺼지면 검은 나무 같다. 붉게 타는 잎 같다. 그림자에서 자라나는 머리카락, 헝클어진 비 같다. 번지며, 절반쯤은 이미 어둠이거나 깜빡이며 지워지는 얼굴. 나는 비에 달린 작은 손을 본 적이 있다. 낮술을 팔던 수리된 고택이었지. 일제히 쏟아지더니, 어느 순간 유리창을 붙잡고 멈춰 있었어. 끈질기게, 마치 두드리다 멈춘 것처럼. 손바닥이 하얗게 질려 있었지. 비의 입술을 본 적도 있다. 길 건너 맥도날드 간판이 커졌을 때, 비는 제 얼굴의 가장 둥근 끝에서 붉은 입술을 열고 이렇게 말했어.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찾고 있다고, 자신을 이곳까지 흘려보낸 슬픔을 찾고 있다고. 영원히 녹으며, 비에게 끝나지 않는 저녁을 입혀준 계절을 찾다가 나를 보았지. 비에게 나는 횡단보도였을까. 언제나 건너편을 가지고 있어서 잠시, 유리창 안에서 두 눈으로 깜빡이는 신호등이었을까. 푸른빛과 붉은빛. 거기 으깨어진 내 비 오는 저녁 속에서 바퀴 소리를 내며 이번 생을 굴러다니는 자동차들을 세우고 싶었을까. 귀갓길. 우산을 들고 있어도 바지는 비에 젖고, 바지가 젖으면 꼭 내 그림자가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은데. 조금씩 그림자가 되어 나는 흘러온 것 같은데, 고백하지 않았어. 내가 눈사람이었다고, 건너편을 지나 비탈 너머엔 집, 저녁을 먹고 빨래를 하고 슬픔도 없이 자고 나면 다시 공장을 돌리러 갈 시간이거든.
문학과 지성 시인선 606 신용목 시집 우연한 미래에 우리가 있어서 12p
얼띤 드립 한 잔
언니와 언덕 사이에서
눈밭에 눈사람을 보고 있다. 그것은 한 인간이 없었던 사람처럼 있었던 삶을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그 사람은 검은 그림자 같고 짙어지는 어둠과 같다. 그러면서도 투명한 밤에 마치 편의점 간판처럼 반짝이고 배고픔 의식에 무언가 있을 거 같은 안식과도 같다. 꽃밭에 꿀을 모으느라 벌들이 윙윙거리듯 이쪽 창끝에서 저쪽 창끝까지 가는 길은 신호등처럼 깜빡거리기만 하고 얼음장 같은 얼굴로 화로가 있는 방바닥을 닦는 일은 그야말로 난간이었다. 그러나 신호등은 언제 그랬냐는 듯 금시 꺼졌다가도 켜지기를 부지기수 띄엄띄엄 사정을 털어놓다가도 주섬주섬 닦아 올리는 머리카락에 웃고 말지만 역시 이건 비였다. 절반쯤 어둠이 지고 절반쯤 얼굴이 드러날 때는 작은 손을 내민 입술에 언뜻 붉은 기가 오르고 이는 낮술을 팔던 종이 씨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싶다가도 끈질기게 매달리는 아이를 떨쳐버리기에는 내 손은 너무 하얗고 길 건너 머리방에 파마하러 간 종이 씨를 애끓게 부르기만 한다. 난 고등어입니다. 어떤 목적으로 여기에 오셨나요? 다른 건 모르겠고 돈이 필요하오. 난 일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는 주저躊躇함이 없이 총을 빼 들었다. 탕, 그렇다. 눈사람이 서 있던 자리를 찾고 있었다. 그러나 슬픔은 예전에 미처 알지 못한 곳에서 일고 영원은 죽음과 동시에 이별이 온다는 것을 가슴에 담아두는 일이었다. 봄은 오고 여름은 잠시, 가을은 오색찬란한 불꽃놀이였다면 겨울은 삭풍이 불고 눈발만 있을 뿐이었다. 언제나 건너편을 주시하였고 철컥거리는 철문을 두드리는 일 아직도 치켜드는 고개를 넘는 일 이번 생은 아무래도 토한 것 같다. 속이 메슥거려 아무것도 먹지 못하겠어. 귀갓길, 비는 내리고 우산은 언니 것인데 왜 내가 젖고 있지. 아직도 고백 못 한 것이 있었을까! 저기 저 언덕 너머 보랏빛 무지개를 봐, 우리가 서로 돕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를 돌봐주겠소. 하야 웃기지 마. 아무도 없는 공장을 돌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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