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폭포 =윤의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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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없는 폭포
=윤의섭
다른 꽃은 없느냐고 묻자
화원 주인은 따라오라며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갔다
훅 끼치는 열기에 차오른 안경의 습기가 지워지면서
물봉선 치자 원추리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나무가 눈앞에 펼쳐졌다
주인장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고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꺼번에 피어난
좁은 길 헤치며 들어갈수록
머리보다 큰 꽃 앞에서 넋을 잃고 서 있던 어린 시절 퍼뜩 떠오르다가
어느 빈소에 바치던 국화 한 송이와 함께 잊어버린 영정이 설핏 비치다가
세상의 모든 꽃을 암수 한 쌍씩 먹어 버린 이 흰고래의 배 속
애당초 찾고 있던 꽃이 무엇이었는지 떠오르질 않는다
태양이 사라진 백야의 별유천지비인간계를 헤매는데
구석진 자리에 피어 있는 죽은 꽃 오래 기다렸다는 듯이 숙인 꽃송이를 든다
꽃 앞에 얼어붙은 듯 서 있는 나는 서서히 녹아내리는 폭포였다
밑도 끝도 없이 영원히 흐느껴 내리는 눈물이었다
들린다고 말하지 마라
무섭다고 말하지 마라
짓물러 쏟아져 내리는 이 속내를 들여다보라
나는 누군가를 기다리며 수수 계절 피어 있을 것이다
그날 화원 바깥으로 나온 기억이 없다
민음의 시 163 윤의섭 시집 마계 62-63p
얼띤 드립 한 잔
말하자면 시적 화자는 화원에 들어가 온갖 꽃에 탄복하며 입을 떼지 못하고 있다. 그렇지만, 또 특별한 꽃을 찾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것은 내 마음을 알아줄 수 있는 꽃이며 그 꽃이 내 앞에 있다는 듯이 상황을 전개하며 그 상황에 푹 빠져 있는 실정을 그리고 있다. 그러므로 시적 화자는 다른 꽃은 없느냐고 묻자, 화원 주인은 따라오라며 비닐하우스 안으로 끌고 들어간다. 시적 객체는 비닐하우스와 같은 온실일 거라는 생각도 든다. 왜냐하면, 언어의 꽃씨를 품고 있는 곳 그것이 어떤 꽃으로 필 것인지 우린 알 수 없지만, 특별한 기술과 노동으로 배양과 보살핌 같은 것은 필요하겠다. 그러한 비닐하우스에 들어가기라도 하면 훅 끼치는 열기에다가 이는 열정을 뜻하는 것으로 여기에 차오른 습기까지 안경은 흐릿하겠다. 안경은 눈을 보호하는 기구일 것이겠지만 안경眼境으로 생각이 미치는 범위다. 물봉선 치자 원추리 이름을 알 수 없는 꽃나무가 눈앞에 펼쳐졌다. 물봉선과 원추리는 꽃 이름이지만, 하나는 구체를 다른 하나는 어떤 근본적인 이야기(推論)를 끌어내는 작용처럼 들린다. 그러자 주인장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이야기 실마리가 언뜻 잡히지 않는 것이다. 점점 깊숙이 들어갈수록 봄 여름 가을 겨울이 한꺼번에 피어난 좁은 길 헤치며 들어간다. 시적 객체의 머릿속을 누비는 행위적 묘사다. 머릿속 즉 골목을 누비면 누빌수록 빈소와 같은 곳 국화 한 송이가 있고 영정이 언뜻 내비친다. 빈소는 비어 있는 소, 국화는 내면局에 꾹 눌려 있는 이야기話 같은 것 영정은 바르거나 곧은 그림자로 어떤 검정을 상징한다. 이러한 모든 것이 이 흰고래의 뱃속 산물일 것이다. 물론 떠오르지도 않았고 애당초 꽃인지 분간이 가지도 않을 것이지만, 시적 자아인 태양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백야의 별유천지別有天地 비 인간계를 헤매며 ‘나 좀 깎아도’ 마 좀 다듬으라고 하며 구석진 자리에서 항의 아닌 항의를 한다. 이들은 내 바라는 꽃은 아니지만, 이 꽃 아닌 꽃 앞에서 눈은 서서히 녹아내리고 폭포처럼 하염없이 골몰하게 된다. 들린다고 말하지 마! 무섭다고 말하지도 마! 짓물러 쏟아져 내리는 이 속내를 들여다봐라, 뭐가 틀렸지 또 뭐가 또 삐져나온 건 없는지 좀 봐라. 이런 뜻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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