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의 집 =이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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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의 집
=이재훈
햇살이 술을 마신다. 거리는 방금 목욕을 한 것처럼 뽀얗다. 나는 버스 안에 앉아 술에 취해 이글거리는 햇살을 본다. 한 소녀가 버스에 오르며 묻는다. 이 버스는 천국으로 가나요? 햇살이 일그러지고 사람들이 비틀거린다. 광화문 네거리. 한복판에 우뚝 선 이순신 장군 동상이 흠칫 움직인다. 칼자루를 놓고 싶다 후손들아! 꽃잎이 비틀거리며 이글거리는 햇살 속으로 날아간다. 차창 밖으로 흩날리는 꽃잎을 보며 사람들이 와 좋아한다. 나도 꽃잎이 되고 싶어요! 아가씨가 황급히 벨을 누른다. 햇살은 집이 없다. 사방 어디를 가도 햇살이 누워 있다. 나는 집 없는 햇살이 시큼한 술내를 풍기며 창가로 살짝 몸을 기대는 것을 보았다. 잠이 온다. 저 햇살에 집을 주고 같이 무너져내리고 싶다.
문학동네 포에지 048 이재훈 시집 내 최초의 말이 사는 부족에 관한 보고서 45p
얼띤 드립 한 잔
나는 죽은 자다. 햇살은 시 객체로 죽은 자를 그리워한다. 그러므로 목욕을 하는 것처럼 마음을 닦고 있다. 마음을 닦는다는 것은 죽은 자와 거리를 좁히기 위함, 버스는 수많은 자로 이룬 하나의 틀이며 소녀는 이쪽과 저쪽을 오가는 자, 하나의 시어다. 광화문은 빛이 되는 될 수 있는 文이자 門이다. 그 빛이 죽음을 향하든 아니든 지금, 이 순간만큼은 줄곧 내리쬐고 있다. 이순신 장군은 이미 죽은 자로 칼맛을 아는 자다. 그 칼자루를 쥔 자는 햇살이며 뒤에 따라 죽을 후손임은 틀림이 없다. 꽃잎은 봄바람에 나불거린다. 차창은 집안의 굴레에서 집 밖의 무력감에 늘 허탈함에 찌들곤 하지만 사람들은 좋기만 하다. 눈은 빠지라 보고 있으니까, 나도 꽃잎이 되고 싶어요. 아가씨는 집안의 핵심을 이루는 자로 종을 눌러쓴다. 마치거나 늘어지거나 그것이 부스럼이거나 관계없이 따르기로 한다. 햇살은 집이 없고 눈과 바람만 있다. 그런 햇살이 나는 좋다. 어디를 가도 햇살은 있으니까, 시큼한 술내에 술주정까지 하는 저 만 정에 다 떨쳐버릴 수 있으니까 몸은 기대고 이제는 싸늘한 눈빛에 접시를 닦을 시간, 잠이 온다. 저 햇살과 같이 좋거나 싫거나 함께 누워 잠을 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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