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 왔던 아이들 =김중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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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중 왔던 아이들
=김중일
오늘 이 시간은 세상의 아이들이 왜 점점 줄어드는지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오늘도 아이들이 마중 나왔습니다. 우주복에 몸을 맞춰 작디작게 웅크린 아이들이, 자궁을 껴입고 밤낮으로 시간 여행 끝에 먼 훗날로부터 우리를 마중 나왔습니다. 오랜 전통입니다.
아이들의 아이들이, 이 아이들을 마중 나올 때까지 수십 년간 우리는 함께 가려 합니다. 마중 온 아이들은 만나자마자 울음을 터뜨립니다. 미안해,
미안해, 우리는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해 물어보려 합니다.
밤새 우는 아이여, 만나자마자 목 놓아 우는 이유가 이제부터 차차 다가올 참혹을 이미 다 알기 때문인지, 하필 지금 우리의 시간으로 오게 된 당혹 때문인지.
마중 나온 봄이, 우리의 손을 놓고 먼저 가버립니다. 여름 가을 겨울이, 바람 새 꽃이 그리고 오늘이 마중 왔다가 먼저 가버립니다.
마중 온 아이들이 먼저 가버립니다. 어느날 한순간에 흠뻑 젖어버린 아이들의 손을 우리는 미끄러운 물고기처럼 놓치고 맙니다. 아이들이 두고 간 소금가마니 같은 시간을, 당나귀처럼 우리는 지고 갑니다.
마중 왓다가 먼저 날아가버린 세상 새들의 여생이 쌓여, 남겨진 텅 빈 하늘은 높아집니다. 죽은 새들이 미처 다 날지 못한 거리만큼, 매 순간 우주는 팽창하고 하늘은 둥글고 드넓어집니다.
새가 다만 새를 찾아 떠나고, 마중 왔던 아이들은 다만 마중 올 아이들을 만나러 서둘러 떠난 것입니다. 아이들은 원래 있던 아이들의 시간으로 돌아갔습니다.
다시는 이곳으로 오지 않을 것입니다.
창비시선 424 김중일 시접 가슴에서 사슴까지 20-21p
얼띤 드립 한 잔
우물에 갇혀 버린 아이를 건져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많은 아이를 보냈을까? 어떤 시인은 아이를 ‘i’로 표현한 분도 있었다. 아이는 자를 제유한다는 것도 분명하지만, 아이에 대해 우리는 어떤 고민을 하고 아니 어떤 고민을 아이에게 업혀 저 이면지라 할 수 있는 땅에 보낼 수 있을까? 아이는 분명히 하루라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하루에 무엇을 묻혔던 어떤 감정을 가졌든 어떤 일을 하고 어떤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어떤 한 일에 대해서 수많은 감정이 오가고 수없이 많은 생각을 다졌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이는 거저 멍청한 하루는 아니었다. 시간이라는 거, 무한정 주어져 있는 건 아니니까, 하루라는 것도 24시간밖에 주어져 있지 않고 이 중 제대로 쓸 수 있는 시간도 불과 몇 시간 되지 않으니까. 그 몇 시간 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진정한 아이를 만나는 시간은 단 몇 분이면 되는 것도 그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그냥 흘려보내는 아이 또한 적지 않게 많을 것이다. 아이는 늘 바쁘다. 아이가 없는 아이로 이 땅에 서서 봄 여름 가을 겨울을 맞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이었는지도 모르게 세월은 가버렸으니까, 과연 그렇다면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아이가 그리는 세상은 무엇인가? 한 치 오차 하나 없는 성에 이르는 길이다. 그 성은 너무나 미끄덩해서 잡았다 하면 미끄러지고 혹여 잡은 것도 스으윽 빠져나가기 일쑤였다. 그것은 아직도 흙벽에 이르지 못한 나의 발로다. 차분함이 없고 헛된 시간을 보내지 않으려는 긴박과 초조가 그대로 나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순박하다. 순박하다 못해 느긋하다. 순박하고 느긋한 저 아이를 데려올 수 있는 일은 마중이며 애써 살피는 것도 마다하지 않아야 하며 금쪽을 다루듯이 신중해야 한다. 그러면 아이와 함께 하는 날, 백발에 이역만리를 이룰 것이다. 이 답답한 우물에서 진정 떠나고 싶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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