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벌레들 =송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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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벌레들
=송재학
아스팔트로 포장된 방죽길을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기어가는 자벌레, 한 뼘 두 뼘 자신이 가야 할 땅의 길이를 몸으로 재면서 꼬리가 가슴에 붙자마자 떨어지며 꼼지락 이동한다 초록색 몸이 햇볕에 그을리면서 고동색으로 바뀌는 자벌레들, 웬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자벌레도 있다 한쪽은 강과 연결된 풀숲이고 다른 쪽은 전답과 연결된 풀숲이다 풀숲은 서로 노려보는 중이다 사람에게 밟혀 몸이 터진 자벌레의 피는 푸른색, 풀숲의 풀잎 하나가 삐져나온 듯 눈을 찌른다 왼쪽으로 이동하는 자벌레들은 언젠가 왼쪽에서 오른쪽 풀숲에 도착한 무리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25 송재학 시집 슬프다 풀 끗혜 이슬 19p
얼띤 드립 한 잔
자벌레는 살아 있는 생물을 대변한다. 아스팔트는 검정을 상징하며 포장된 방죽길은 검정에 이르는 지침서다. 모 방方 대 죽竹 혹은 죽 죽粥으로 자벌레에게는 필수 영양소다. 그 죽을 먹으며 한 뼘 두 뼘 자신이 걸었던 땅을 가름하고 자신을 되돌아보는 성찰을 갖는다. 그 성찰의 시간을 형광 아래 빛나는 초록색이라면 고동색은 검정에 가까운 것으로 또 다른 하나의 방죽에 이르는 길이기도 하다. 웬걸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느릿느릿 움직이는 자벌레도 있다. ‘웬걸’은 뜻밖이라는 뜻의 감탄사, 그러니까 원래 자벌레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만 가야 하는 데 이건 반대라는 뜻이다. 왼쪽은 늘 죽음이 머무는 곳을 상징하며 오른쪽은 삶을 대변한다. 자벌레는 어떤 한 경계에서 이쪽저쪽 다 오가는 사고의 통칭이다. 한쪽은 강과 연결된 풀숲이라 하고 다른 쪽은 전답과 연결된 풀숲이라 한다. 강은 대체로 시간을 상징하지만 여기서는 바다와 연결된 영원한 생명을 싣는다. 전답은 물론 논과 밭으로 아직도 경작의 미련을 담는다. 풀숲은 시체 구덩이다. 사람에게 밟혀 몸이 터진 자벌레의 피는 푸른색, 푸른색이라는 말은 아직도 수정할 곳이 많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풀숲의 풀잎 하나가 삐져나온 듯 눈을 찌른다. 눈 찌를 곳 없는 방죽에 이른다면 비로소 자벌레는 왼쪽의 세계 즉 강물 따라 흐를 것이다. 언젠가 왼쪽에서 오른쪽 풀숲에 도착한 무리로 설 것이다. ‘언젠가’라는 말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시간으로 예견하는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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