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한 삽화 =채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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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삽화
=채호기
“수긍할 수 없는 데요.”
소녀는 고개를 똑바로 쳐들고 말했다.
“무얼 수긍할 수 없는데.”
선생은 감정을 억누르면서 띄엄띄엄 천천히 말했다.
선생을 쳐다보는 소녀 눈의 홍채는
갈색으로 원 둘레가 확장되면서 양귀비 꽃잎으로 빠르게 피어났다.
그 순간 누군가가 공기가 정체된 창밖을 내다봤다.
숲 오솔길 땅구멍에서 땅벌 한 마리가 빠져나오더니
날개를 비벼 펴고 날쌔게 꽃잎을 향해 날았다.
문학동네시인선 112 채호기 시집 검은 사슴은 이렇게 말했을거다 045P
얼띤 드립 한 잔
영화 ‘원티드’를 본 듯한 느낌이다. 쓰레기통 안에 날아다니는 파리가 있다. 저격수만으로 이루어진 비밀결사대 수장은 주인공에게 저 날아다니는 파리의 날개를 맞춰 떨어뜨리라고 명령한다. 주인공은 순간 심장박동수가 초당 400회가 오르고 처음으로 초점을 맞춰 몇 방 총알을 날린다. 사실, 자신도 저격수 기질이 있는지도 모르면서 순간 놀란다. 탕. 탕 탕탕. 탕. 날개는 떨어졌고 몸뚱어리만 덩그렇게 받아 든 종이 위 파리들 주위 저격수까지 손뼉을 친다. 복잡 미묘한 세계에 우리는 살고 있다. 삽화처럼 잘라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현실에 우리의 선택은 굉장한 혼돈을 머금으며 갈등한다. 이게 맞는 것인지 가만 보면 아닌 것 같고 아니기에는 또 저을 수 없는 고개만 치켜든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고 나면 선택은 지나가 버리고 황금의 포인트는 늘 잃고 만다. 심장박동수 초당 400회 웃음이 나지만, 날아다니는 파리의 날개를 꺾는 일, 한 방 절묘한 맥을 짚는 일은 기술이다. 다 지나고 나면 보이는 양귀비 꽃잎이다. 이쪽과 저쪽 두 양兩에 돌아갈 귀歸에 견주거나比 아닌非 사실들. 숲 오솔길 땅 구멍에서 땅벌 한 마리가 날개를 비벼 펴고 날쌔게 꽃잎을 향해 날아가듯 처마에 생풀 깨끼겹저고리 받쳐 입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까지다. 복잡한 백보드가 아닌 단순한 농구로 빈집을 지키는 일은 없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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