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화 =이소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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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崇烏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57회 작성일 23-04-11 20:33본문
혜화
=이소호
나는 나 같은 너에 대해 말한다 당신이 파 놓은 구멍마다 들어가 보는 고양이처럼 너라는 나에 대해 말한다 모자란 2월의 날들을 걸어 놓은 옷걸이 푹 삶은 하얀 양말을 신고 건너간 수화기 너머에는 내가 버려 놓은 말들이 떨고 있다 먼지 위에 쌓아 올린 일기처럼 문턱을 넘지 못한 발가락처럼 나는 나보다 멀리 가 떨고 있다
나는 당신으로부터 있다
나는 네 침대에 놓인 긴 머리카락보다 말이 없다 말을 뒤집어 우리는 뒷면을 응시한다 하루의 뒷면, 칫솔의 뒷면, 크랜베리 빵의 뒷면, 미키마우스 티셔츠의 뒷면, 그리고 섬의 뒷면 당신은 잘린 손톱처럼 외롭다 섬, 섬 나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 꺼진 등대를 생각한다
얼띤感想文
시제 ‘혜화’를 본다. 혜화惠化면 은혜를 베풀어 교화하는 것을 말하며 또 혜화慧火면 지혜의 불이라는 뜻을 갖는다. 전자면 누가 누구에게 타이르는 듯하고 후자면 성찰의 의미가 있다. 이 시에서 두 번째 단락, ‘나는 당신으로부터 있다’라는 문장을 본다. 그러니까 당신이 없으면 나는 없는 것이 된다. 그러면 시적 주체는 ‘나’인가 ‘나 같은 너’인가 시 문장 끝에 나는 스위치를 내리고 불 꺼진 등대를 생각한다, 고 썼다. 그러니까 모든 상황을 내려버리고 망망대해를 보며 홀로 서 있는 듯한 존재는 역시, 시적 주체인 ‘나’다.
사실 나는 너 없으면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는 존재다. 가만히 생각하면 모자란 2월의 날들을 걸어 놓은 옷걸이 푹 삶은 하얀 양말을 신고 건너간 세계였다. 옷을 주체성으로 본다면 옷걸이는 주체성의 상실이다. 푹 삶은 햐얀 양말은 어찌 됐든 쓰고 싶은 아니 하고 싶거나 주고받아야 할 말들의 축적蓄積이다. 먼지 위 쌓아 올린 일기며 문턱을 채 넘지 못한 자아였다. 거기다가 함께 쓴 침대는 짜증만 날 듯 긴 머리카락의 시구만 날리고 모든 것에 대한 당신의 의존과 그 의존 뒤에 오는 양말, 즉 오가는 말 사이 당장이라도 셧다운(스위치)하고 싶은 일만 쌓았다.
나는 이 시를 읽으며 불 끄지 못한 등대, 카페를 생각했다. 30년 가까이해 온 일이다. 역시 천직이지만, 직업의 위태는 하루 이틀이 아니었다. 배전焙煎이 잦아야 할 업무 부쩍 는 필경연전筆耕硯田도 아닌 이 일에 다만 마음만이라도 안정을 누린다. 가만히 생각하면 카페에서 가장 멋진 일은 그나마 문화강좌였다. 잠시 옛 모습을 떠올리며 나의 등대에 불 켤 수 있는 그 날이 있기를 고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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