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박판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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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박판식
나는 거울 속에서 조용히 살고 있는 사람이다
나는 누군가가 바라볼 때만 나타나는 이상한 비밀이다
자신의 그림자가 힘겨워 쓰러진
이가 빠진 채로 웃는 화가다
자기가 아닌 것은 끝내 자기 안에서 빠져나간다
나는 세계의 잉여다
매번 허탕 치는 괘종시계다
누군가 보아주지 않는다면 세상 그 누구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슨 모양인가
서로를 가장 많이 소유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비밀이 너무 많아 입술을 가지지 못한 나무들처럼
그 나무들 사이로 흘러가 저수지에 이르는 길처럼
너를 아름답게 만들지 못한다면 결코 사랑은 아니다
여름날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색색의 풍선들, 그것들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사랑의 기념비다 어둠이면서도 스스로를
빛이라고 착각하는 꿈처럼
민음의 시 195 박판식 시집 나는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 47p
얼띤 드립 한 잔
시 ‘언제나’는 시 주체적 처지에서 묘사한 글이다. 시는 명경지수明鏡止水다. 맑은 거울과 고요한 물, 잡념과 가식과 헛된 욕심이 없는 맑고 깨끗한 마음이다. 현실은 복잡미묘한 세계라 그 함의가 있다면 물의 정도, 물의 온도, 물의 상태, 물의 속도, 물의 정교한 손맛에 따라 다시 태어난 시, 그 시 맛을 풍부하고 섬세하게 뽑는 건 역시 자아다. 거울에 비추는 일은 시를 쓰는 자 자아의 의무다. 그러므로 시는 누군가 바라볼 때만 나타나는 이상한 비밀 같은 것이 있다. 그것은 자신의 그림자가 힘겨워 쓰러진 이가 빠진 채로 웃는 화가나 다름이 없고 자기가 아닌 것이 끝내 자기 안에서 빠져나간 것과 같다. 그러니까 시는 오밀조밀奧密稠密하다. 매우 세밀하면서도 교묘한 거울이나 마찬가지다. 이는 매우 자상스럽고 꼼꼼함을 의미한다. 시는 세계의 잉여다. 세파에 온 정신을 실어 닦은 육이 있다면 다친 발로 그 세계를 보듬는 일이다. 매번 허탕 치는 괘종시계다. 괘종시계가 바라보는 건 늘 오 분이다. 오 분에 종을 치고 주인집 마루에 걸려있는 새벽을 더욱 성결하게 다듬어 놓는 일 역시 시다. 누군가 보아주지 않는다면 세상 그 누구도 결코 아름다울 수 없다. 캄캄하기 때문이다. 어둠은 삼라만상이 먹칠하는 것같이 오고 검은 갯벌 밭 푹푹 빠진 발등이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슨 모양인가? 서로를 가장 많이 소유하는 방법은 어떤 것인가? 물방울이다. 거울을 보는 일, 머리를 다듬고 손질하는 일, 그리고 하얀 이 드러내고 아무런 일 없다는 듯이 한 번 싱긋이 웃어 보는 일이다. 비밀이 너무 많아 입술을 가지지 못한 나무들처럼 그 나무들 사이로 흘러가 저수지에 이르는 길처럼 너를 아름답게 만들지 못한다면 결코 사랑은 아니다. 입술을 가지지 못한 나무, 립-서비스도 기술이다. 나무란 벌거벗은 존재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상징한다. 저수지 영어로 얘기하자면 pool, 무엇을 담을 것인가? 마음 말이다. 여름날의 하늘로 솟아오르는 색색의 풍선들, 그것들은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사랑의 기념비다. 어둠이면서도 스스로 빛이라고 착각하는 꿈처럼. 개권유익開卷有益이다. 책을 열면 무엇이든 얻는 게 있고 통개중문洞開重門이듯 겹겹 닫힌 마음을 열어 놓는 일만 있을 뿐이다. 굳이 애써 떨어뜨릴 필요까지 있을까? 마음을 너그럽게 가지어 작은 일에 얽매이지 않는 일 그러므로 시는 언제나 거울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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