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는 죽었다. 브라운은 부고에 죽었다는 말 대신 좋아하는 낱말을 넣었다. 찰리는 들국화. 소식을 모르는 옛 친구가 전화를 걸어와 찰리의 안부를 물으면 찰리 브라운이 슬퍼하며 대답했다. 찰리는 들국화. 그리하여 찰리는 향기롭고 피고 지고 브라운을 낳고. 시간이 흘러 다시 찰리는 들국화. 찰리 브라운은 부고를 냈다. 장례식장에서 많은 사람이 찰리 브라운의 손을 잡았다. 애도하네. 찰리는 살구. 살구꽃이 피고 찰리는 브라운을 낳고. 브라운은 여전히 찰리 브라운. 찰리는 살인자. 찰리는 콜레라. 나는 찰리 브라운의 오랜 친구다. 찰리 브라운은 가끔 내 시를 읽었다고 말했다. 이해하기 어렵다면서. 그래도 좋다고 말했다. 뜨거운 여름 내가 다시 찰리의 장례식장에 갔을 때 찰리 브라운은 행복해 보였다. 하루 전에 아내가 내게 건네준 부고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찰리는 죽었다.
문학동네시인선 223 여성민 시집 이별의 수비수들 108p
얼띤 드립 한 잔
시를 읽는 목적은 부찰앙관俯察仰觀에 있다. 아래를 굽어살피고 위 우러러보는 일이다. 우러러본다는 것은 따스함이 배이고 용기는 잃지 않으며 재기와 뒷심을 배양한다. 또 시를 읽는다는 것은 영음찰리聆音察理에도 있다. 소리를 듣고 조그마한 일에도 주의해서 살피는 일이다. 시제 ‘찰리 브라운’은 시 주체를 제유한 찰리와 시 객체를 은유한 브라운의 합성어다. 물론 외국 이름이지만 찰리는 찰리察理처럼 와 닿는다. 브라운은 검정에 못 미치는 어감까지 묻어 나오고, 그런데도 찰리 브라운은 한 사람으로서 시와 일체감을 이루고 이루려고 이루고자 하는 욕망까지 숨겨져 있다. 사실 찰리는 죽었다. 우리가 보는 시는 다 죽은 것이다. 딱딱한 통나무나 다름없다. 여기에 생물처럼 불어넣는 입김은 브라운을 품은 독자다. 그러므로 브라운은 부고에 죽었다는 말 대신 좋아하는 낱말을 넣는다. 죽음을 시사하는 말과 통나무와 같은 시어를 골라야 마땅한 이치지만, 브라운은 아직 그렇지 못한 실정이다. 그러므로 찰리는 들국화가 피기도 하고 살구꽃이 피기도 한다. 더 나가 찰리는 살인자처럼 내 속에 든 살아 숨 쉬는 글자를 죽이려고 죽이고자 안간힘을 하고 찰리는 콜레라처럼 전염성 강한 병균까지 퍼뜨려가면서 더욱 죽음으로 몰고 간다. 이러한 죽음을 몰고 가는 곳 그 현장은 역시 장례식장이다. 물론 장례식장이 시집을 제유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브라운이 검정에 이를 때 아내는 부고장에다가 지백수흑知白守黑을 이룰 것이다. 아내는 아내가 아니고 나라는 것도 그리고 찰리는 영원히 죽게 될 것이며 브라운 역시 따라 죽음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