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경궁에 가려고 했던 것이 아닌데 어쩌다 보면 창경궁에 가게 된다. 창경궁에는 꼭 그렇게 해서 간다. 결국엔 그렇게 가게 되는 게 좋아서 창경궁에 간다. 가을밤이 가장 멋지다는데 항상 한여름 한낮에만 가게 되는 것도 창경궁이다. 창경궁에 가면 홍상수 얘길 해서 좋다. 홍상수 얘길 하고 나면 그 사람을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이쯤에서. 응. 이쯤에 선희가 서 있었나? 연못가에 서서 그런 얘길 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울타리 앞에 서 있으면 비로소 동행자와 내가 서로를 볼 수 있다. 이 울타리는 연못을 위한 것인지 사람을 위한 것인지. 그런 눈빛을 느낄 때도 있다. 안내소에서 얻어 온 책자를 매번 쓰레기통에 집어넣고 나오면 다시 창경궁이 궁금해진다. 다음번에 갈 땐 버리지 말고 가방에 넣어 와야지 생각하고, 같은 걸 되풀이한다. 한여름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창경궁을 걸으면 좋다. 그런 게 끝나고 우동을 먹으면 좋다. 해마다 여름에 하면 좋다.
문학과지성 시인선 596 김이강 시집 트램을 타고 33p
얼띤 드립 한 잔
창경궁은 마음을 놓을 수 있는 곳 쉴 수 있는 곳이다. 어떠한 목표 같은 것도 없고 어떠한 경제적인 이유도 달지 않는다. 어쩌다 거닐면서 푸른 하늘을 보고 땅을 밟을 수 있다면 거기가 바로 창경궁이다. 창경궁이라 해서 별다른 것이 있는 게 아니다. 누구를 꼭 만나기 위해서 가는 곳도 아닌 고저 이마에 땀 송골송골 맺으며 걷는 기분 가뿐한 걸음걸이로 솔잎 스치는 바람과 찐 송편 같은 구름을 보는 일 고것 한 입 같은 거리감 때문이다. 홍상수는 인명이지만 여기서는 인명으로 쓰이지 않았다. 붉은빛과 맑은 물로 살아 숨 쉬는 삶의 현장을 대변했다. 선희도 마찬가지다. 선한 계집아이처럼 들릴지는 모르지만, 자의 제유다. 연못가에 서서 그런 얘길 해도 수상하게 여기지 않는다. 나는 분명히 이 조용한 저녁에 앉아 창경궁에 갔다는 얘기를 읽으며 나의 하문을 놓고 있다. 이는 연못을 만든 것이며 그 연못가에 서서 연못을 위한 것인지 사람을 위한 것인지는 모르나 지금 주어진 시간을 죽이는 것도 사실이고 내가 거닐었던 골목길 어딘가 말끔히 쓸어 내는 비의 소리일 것이다. 또 이러한 것은 안내소처럼 어느 책자를 위한 것일지는 모르나 이 모두 쓰레기통에 불과하다는 것도 사실인 셈이다. 다음번에 갈 땐 버리지 말고 가방에 넣어 와야지 생각한다. 나는 시마을에 넣어버렸으니까, 되풀이하지 않는다. 한여름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며 창경궁을 걸으면 좋다. 끝나고 우동을 먹으면 더 좋다. 우동은 오른쪽과 동쪽을 대변한 시어다. 별자리 좌와 죽음의 그늘이 서린 서와는 대조적임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