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염 =남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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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
=남지은
파라솔을 접는다.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꼿꼿이 발을 세우고 선 나무들과,
바람을 흉내 내며, 춤추듯 나부끼는 이들에게,
드물게 만나자 청한다.
피어오르는 것들을, 의심하지 않는 불을, 불을 믿되 불빛, 불빛만은 멀리할 것,
한밤의 광장, 반투명한 커튼을 드리울 때,
저마다 자기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다듬는 때,
그때, 달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작은 약병을 식탁에 내려놓고 나는,
숨을 뱉듯 당신께 편지 쓰는 고요,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꽃 한 송이를 꺾어주세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그냥 무덤 앞에서 기다려주세요*
모두가 다행이라 부르는 일이 내겐 불행인 때,
파라솔이 접힌다
*존 버거 『A가 X에게』 김현우 옮김, 열화당 2009
문학동네시인선 남지은 시집 그림 없는 그림책 062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전염傳染은 병이 남에게 옮아가는 것을 말한다. 전할 전傳에 물들일 염染이다. 물이 든다는 것 그것은 하나의 노력이 암묵적으로 들어가 있다. 물 수水에 아홉 구九가 들어가 있는 문자다. 아홉은 수의 극치다. 파라솔을 접는다. 파라솔에서 물결 파波에 펼칠 라羅 그리고 거느릴 솔率이 언뜻 떠 오른다. 물론 우산처럼 햇빛을 가리는 기구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마음의 상징적인 시어로도 손색은 없겠다. 접는다. 원래 펼쳤던 것을 본래 모양을 갖추는 일, 노동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갈 때, 꼿꼿이 발을 세우고 선 나무들과 바람을 흉내 내며 춤추듯 나부끼는 이들에게 드물게 만나자 청한다. 책임감이 드러나 있다. 한 해가 기우는 시점, 먼저 떠나간 사람만 자꾸 생각이 난다. 노동은 가치가 없고 꼿꼿이 선, 발은 묶여 나무에 바람만 뒤를 밟고 있으니 사는 게 사는 것이 아니고 피어오르는 것은 다만 허공에 안개처럼 들솟고 있을 뿐 불빛은 그 어디에도 찾을 수 없는 시기다. 한밤의 광장, 일과를 마치고 안석에 기대어 작은 도르래로 무거운 돌을 옮겨 놓는다. 반투명한 커튼을 드리울 때, 백지는 장미로 물들고 저마다 자기의 가장 어두운 부분을 쓰다듬는 때, 아무리 보아도 장래는 보이지 않고 고저 침묵만이 흐를 뿐이다. 그때, 달고 부드러운 냄새가 난다. 살아야겠다. 다시 펼쳐 보이고 작은 약병을 식탁에 내려놓고 나는, 시집을 읽는다. 숨을 뱉듯 당신께 편지 쓰는 고요, 죽을 때까지 마음의 평화는 오지 않을 것이다. 강을 거슬러 올라가면, 꽃 한 송이를 꺾어주세요, 당신이 나보다 먼저 죽으면, 그냥 무덤 앞에서 기다려주세요. 무덤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 오늘도 죽지 못해 삶을 이어나가는 것처럼 다행히 아니라 조금도 줄일 수 없는 불행의 연속이었음을, 나는 가장 어두운 파라솔을 또 접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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