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자물쇠 =박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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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자물쇠
=박연준
이를테면 피아노 건반의 검고 흰 막대들이
어느 것이 ‘도’이고 어느 것이 ‘솔’인지
자기들 속내를 밝히지 않기로 다짐했다는 듯
나를 놀리고 있는 것이다
아침은 쿵쾅쿵쾅 제멋대로 연주되고
누군가는 항갈망제를 삼킨다 사력을 다해
이 생을 통째로 꺼뜨리려 애쓰고
이미 사라진 사과나무 아래서
하나만, 딱 하나만 붉은 우주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봉합된 눈꺼풀을 한 올 한 올 뜯으며
눈물을 좀 흘려볼까,
몇 시간째 끙끙 힘을 주고
모든 이별은 활달하기만 한데
읽어버린 발목을 찾기 위해
휘어진 길이 절뚝이며 헤매도 되나
이대로 아침이 방긋, 깨어나도 되나
문학동네시인선 028 박연준 시집 아버지는 나를 처제, 하고 불렀다 019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보라색 자물쇠’, 보라색은 흰색도 아닌 그렇다고 검정도 아닌 색이다. 다만 보라, 여기 좀 보라 뭔가 강요하는 듯 시의 돈호법頓呼法이다. 자물쇠는 꾹 다물고 있는 시 객체를 상징한다. 시는 저 입을 열어야 할 의무가 있듯이 북을 가리킨다. 피아노 건반은 흰색과 검정으로 이룬 세계관이다. 막대들, 물론 시 객체를 상징한 시어다. 꼿꼿이 들여다보고 있으니까. 도와 솔은 음정의 체계지만, 도는 길을 뜻하며 솔은 거느린 것으로 시가 나아가거나 다스려야 할 그 무엇이다. 항갈망제, 이는 약학 용어다. 뇌에서 술을 강박적으로 섭취하도록 작용하는 신경 부위에 직접 작용하여 술에 대한 갈망을 감소시켜주는 약이다. 누군가는 항갈망제를 삼킨다 사력을 다해, 그러니까 누군가는 언어의 묘미를 찾기 위해 무언가 읽고 있는 모습을 묘사했다. 그러나 그 묘미를 찾고 나면 시는 죽음밖에 없으므로 사력을 다하는 것이고 생을 구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만 있을 뿐이다. 이미 사라진 사과나무 아래서 하나만, 딱 하나만 붉은 우주가 떨어지길 기다리고, 여기서 사과나무는 시 객체다. 사과는 모래가 되었든 지나간 시간이 되었든 아니면 죄를 씻기 위한 하나의 장이었든 사실 아무것도 없는 지면을 향한 부름의 징표 같은 것이다. 그러나 봉합된 눈꺼풀을 한 올 한 올 뜯기만 한다. 눈꺼풀은 검정을 상징하며 여기서는 읽기 나름이겠지만 시 주체가 될 수 있으며 시 객체로 볼 수도 있겠다. 닭을 먹기 위해서는 닭 목을 치고 닭털을 뽑아야 하듯이. 눈물은 구체의 상징이겠다. 읽어버린 발목과 휘어진 길이 절뚝이며 헤매는 일은 보라색 자물쇠를 여는 아침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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