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나는 쪼그리고 앉습니다 =문성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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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나는 쪼그리고 앉습니다
=문성혜
연골연화중에는 좋지 않다고 하지만 쪼그리고 앉는 자세는 펑퍼짐하게 앉는 것보다 골똘하기에 좋습니다 무릎에 젖가슴을 대고 앉아 있으면 아궁이 앞에 쪼그리고 앉아 장작불을 바라볼 때처럼 맘이 한곳을 바라보게 됩니다 이러고 있으면 당신을 더 잘 볼 수 있고 나에게 질리기 전에 무릎을 펴고 당신을 훌쩍 더 잘 떠날 수 있습니다 무릎과 가슴이 딱 붙어 외따로이 팔만 내민 채 생각을 납땜질하는 나는 곤충과도 닮았습니다 그런 나를 납죽 들어다 산속에 놓으면 바위가 되고 들판에 놓으면 탑이 됩니다 쪼그리고 앉는 일은 바닥도 허공도 아닌 오로지 나에게만 속하는 일 오늘도 나는 이 새벽 이부자리 위에 이제 막 직립을 시작한 원시인처럼 쪼그리고 앉습니다 이러고 있으면 재래식 화장실에 앉아 신문지 조각을 읽을 때처럼 엉덩이가 시려옵니다 아직 이러고 앉아 득도한 사람은 없나니 바위와 바위 사이 무릎을 비비며 우는 귀뚜리나 여름 여치들, 무릎으로 걸어가는 왜소증 사람들만이 나의 가련한 신도들, 우리의 일이란 그저 틈이란 틈은 다 비집고 들어가서 쪼그리고 앉아 하루 종일 울거나 멍 때리는 일, 맘이 몸을 이기는 날 우리는 득도에 이를 겁니다
문학동네시인선 088 문성혜 시집 밤이나 한번 먹자고 할 때 042-043p
얼띤 드립 한 잔
시장은 오늘도 저 멀리 달아나고 =崇烏
한동안 가혹한 수탈에 시달렸습니다 시장의 불건전성에 스트레스를 안고 사는 일, 뭐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다만 음악감상을 하며 풀려고 하는 것이 오히려 골독하기에 좋습니다 입에 거미줄을 치고 있으면 어떤 함정에 빠진 것 모양 답답해서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놓고 한 곳을 지키는 호랑이가 됩니다 이러고 있으면 단골은 중지를 꾸부리고 엄지로 비벼놓아 눈언저리만 부어오릅니다 찻잔에 버들잎 띄워 호호 불어가며 버들피리 분다면 소에게 풀을 뜯기는 누렁이는 누워 낮잠을 잘 겁니다 그러나 시장은 노루를 잡기 위해 파놓은 함정으로 새로운 정박지를 향한 항구의 불빛이 되고 느슨한 닻에 더욱 휘몰아치는 돛으로 남풍은 봄을 노릴 겁니다 엉덩이는 화끈한 열기를 내뿜고 그을음을 남기며 가물가물 타는 불꽃을 볼 겁니다 그렇다고 입이라 얘기할 순 없습니다 그가 설사 돌아오지 않는다고 해도 우리는 모질게 끊을 순 없습니다 악연은 길고도 오래된 역사가 있어 장구한 하루가 풍선으로 쭈그러들까 봐 얼굴은 주름살이 얽히고 살갗은 칠순이 된다면 어떤 참화가 올지 예상하기 싫습니다 횡설수설한 말투에서 술기운은 오르고 약주는 꼬부라진 혀로 골목만 서성이며 한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저 개미 하나가 눈에 자꾸 거슬리기만 할 겁니다 햇볕은 따스해서 동네 조무래기들은 공놀이하며 환성을 내지르고 기대는 질뚝거리며 달아나듯이 쿵쾅쿵쾅 가슴만 두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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