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 잠에 들었다 깨어나 떠올린다. “네가 어디서 왔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이 말을 해 준 사람이 누구였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아 기억은 이것을 자신의 경험이라고 믿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안 좋은 쪽으로 예감이 맞아든다. 같은 길을 돌고 또 돌면서 무언가 떠오르길 바라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제 일어날 일들이 있고 아직 일어난 일들이 있고 불이 꺼지면 겁이 있고 불이 켜지면 겁이 없다. 이 암전이 극의 인터미션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은 진행형이 되면 영영 멈춰 버리고 문득 여기서 서로 닮아 갈 때까지 오래오래 살고 싶어지고 키우던 개를 버리면서 건강을 기원하듯이 복잡하게 더러운 사이에서도 자주 눈이 마주치게 되는 기억이 어디에나 하나둘씩은 있어서 이제야 중간이고 아직도 중간이다. 어둡지도 밟지도 않은 균형. 다른 생각이 떠오르길 기다리며 다른 생각을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네가 어디서 왔든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이 일은 돌아갈 때까지 여러 번 반복된다. ‘ ’ 여름보다 먼저 여름의 분위기가 조성되고 있다 얇은 겉옷을 챙겨 나오기 좋은 날씨다 여기 여름의 분위기가 있고 조금만 있으면 여름이 올 테니까 모인 자리에 손님이 오고 있다 다 아는 사이가 오고 있다 우리는 먼저 조성되어 있다 한 면을 비워 둔 주사위가 굴러가고 있다 예상한 질문이 준비되고 있다 그리고 가을이 왔다*
민음의 시 305 김종연 시집 월드 63-65p
*그것이 당신에게 질문한다. 선생님 이것은 자전적인 이야기입니까?
얼띤 드립 한 잔
저기 저 밀려오는 분 냄새를 맡아보았다 어디로 가면 좋을까? 어느 청도를 지나 떠올렸던 소고기 냄새와 그 밑에서 오래 품었으리라 생각이 드는 버섯 냄새가 났다 길가 원두막 같은 곳에서 할머니가 끓여다 준 아직도 따뜻한 손까지 냄비엔 부글부글 끓는 향기가 있다 냄새가 오르면 동네가 다 보인다 막다른 골목 어디쯤 숲의 어깨가 미닫이문 밀며 들어올 때 연붉은 노을은 눈썹에 끼고 말았으니까 숟가락을 올리며 젓가락을 내려놓을 때 황홀한 죽음은 죽어가는 노을을 압도한다 가끔 먼 달을 보면 발길이 떨어지지 않고 나는 다시 보도블록을 밟으며 차 문을 당긴다 축 늘어져 있는 연어가 도무지 상류로 거슬러 가는 길을 찾지 못할 때 돌탑을 맴도는 보살처럼 가을은 단풍잎으로 물들었으니까 난 폭포 밑에서 잠들고 싶어 문고리를 잡고 소리만 질렀다 술 취한 사람은 술 취한 사람을 잡고 마구 흔들기까지 하고 그러나 깨어나지 않고 전주에 귀 기울여 공사에 임한 사람의 노고를 이해한다는 듯 고개만 끄덕였을 것이다 너무 취했어라 한 달을 끼고 설사했으니 빈혈은 오고 졸음은 바닥에 쓸리며 따갑기까지 했다 운전은 장비가 하는데 잠은 지워지지 않고 한쪽 손으로 밀며 의자에 내동댕이칠 때 체면과 격식은 사라지고 푸짐한 이불만 떠올렸다 어느 나라 사람은 국화꽃 말린 잎으로 베갯속 채워 넣어 장수를 도모한다는 데 이불 보따리 얽어매며 오밤중까지도 동네일과 집안일로 목을 죄며 있는 숨 막는 시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