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양목 울타리 집에서 보낸 여름 =박상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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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양목 울타리 집에서 보낸 여름
=박상수
폐타이어 튜브를 띄워놓고 둥실 흘러다니고 싶었던 여름, 페인트칠을 하다가 떨어진 아버지는 신나 냄새에 자주 코를 풀었다 큰물이 지고 나면 양지쪽에 앉아 그림책을 말렸다 처마에 달아놓은 새장에는 잉꼬 대신 집쥐의 잠, 방에서 나오지 않는 가족들은 서로를 잊어갔다
멀리 공장 지붕에선 피아노 줄을 목에 감고 한 사내가 노래를 불렀다 떠내려온 겨울옷을 주워다 하수구를 막았고 바다로 떠나간 아이들을 생각했다 화단 가득 피어 있던 분꽃이 땅을 버리고 사라진 여름, 물을 틀면 기름 섞인 아름다운 무늬가 천천히 마당을 채워나갔다.
문학동네포에지 010 박상수 시집 후르츠 캔디 버스 35p
얼띤 드립 한 잔
조니워커 블랙 라벨=崇烏
젖은 티팬티를 걸어놓고 햇볕 드는 창가 화장실에서 말렸던 여름, 우유를 데워 마셨던 라희는 일회용 휴지를 뽑아 자주 입가를 닦았다 목이 말랐는지 댕댕이는 주인의 발목을 비비며 쳐다보았고 온전히 비운 밥그릇을 핥기까지 하였다 순간 꾸불꾸불 운문댐 돌려 돌아가던 그 길에서 답답하지 않았던 이유를 떠올렸다 오색찬란한 단풍에 불긋한 산은 더욱 빛을 발하고 드라이브 내내 복잡한 가족관계를 지워버렸으니까 레이스 한 장 걸치며 부엌으로 간 단발머리는 냉동고 문을 열며 얼음 몇 개 끄집어내어 유리잔에다가 담았다 선반에 놓인 조니워커 블랙 라벨을 따랐다 얼얼한 화기가 또 한 번 입술을 적실 때 몽롱한 안개 밭을 거닐 듯 속세는 미련이 없어 보였다 =
여기는 시를 쓰는 마당이다. 시인께서 시제로 사용한 회양목 울타리 집에서 보낸 여름, 이건만 보아도 시 문장 하나를 이룬다. 회양목 울타리가 시 객체며 집에서 보낸 이가 시 주체가 된다. 회양목이라는 시어, 돌고 도는 볕 든 나무다. 폐타이어 튜브, 검정을 대신에 한다. 마치 구체처럼 그 역할에 이미지를 충분히 살렸다. 그림책을 말리는 행위는 데칼코마니다. 마치 인쇄하듯 콕 찍는 어떤 감이 묻어있다. 처마, 말이 기거한 곳이라면 잉꼬는 다정하고 금실 좋은 것을 상징했다. 집쥐는 실험적이며 해충에 가까운 것을 은유한다. 가족은 역시 밑바닥에 얽힌 자들의 역학관계다. 피아노는 이미 설명한 바 있다. 저 피彼에 해당하는 나 아我거나 싹 아芽거나 늙을 노老 이슬 로露로 환치가 가능한 시어다. 분꽃 다른 말로 하면 분조라 해도 되겠다. 얼핏 선조와 광해군의 관계가 지나간다. 물을 틀면 기름 섞인 아름다운 무늬가 천천히 마당을 채워나갔다. 하나의 역사를 이루며 역사가 되는 시점이다. 과연 그것이 또 하나의 여름을 맞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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