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잔 =박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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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 한 잔
=박 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요 삼고, 산을 베개 삼고 구름을 병풍 삼고, 달을 등불 삼아 유유자적하던 진묵 스님에게도 한가지 걱정은 있었으니, 춤을 추다 소매 자락이 곤륜산에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거였다.
하늘은 먼저 간 이들에게 넘겨주고, 땅은 살아 있는 이들에게 빼앗기고, 산은 연인들에게 내주고, 구름은 민통선 너머로 갈 것이고, 달은 해 따라 숨을 것이나, 나에게도 한 가지 기쁨은 있으니 맑은,
맑은 물 한 잔 마시는 일이다.
문학동네시인선 220 박 철 시집 대지의 있는 힘 047p
얼띤 드립 한 잔
天衾地席山爲枕(천금지석산위침) 하늘은 이불이고 땅은 자리다 산은 베개로 쓸 것이니
月燭雲屛海作樽(월촉운병해작준) 달은 촛불로 구름은 병풍으로 바다는 술독으로 삼는다
大醉居然仍起舞(대취거연잉기무) 크게 취해 쉽사리 그에 따라 춤을 추니
却嫌長袖掛崑崙(각혐장수괘곤륜) 긴 소매가 곤륜산에 걸릴까 걱정이로다
진묵(震黙: 1562-1633) 스님께서 남긴 시 한 수다. 진묵은 석가모니 부처님의 작은 화신으로 불기도 했다. 조선 중기 고승이다. 당시 사람은 그를 파계승(破戒僧)이라 했지만, 계율에 연연하지 않은 절대 자유를 누렸다. 그가 남긴 생애의 갖가지 기행은 인터넷에 꽤 있으므로 참고할 만하다. 스님에 대해 한 가지 더 쓴다면 술을 꽤 좋아하시어 곡차(穀茶)라 불렀는데 지금까지 술을 곡차로 쓴 연유가 여기에 있다.
시인은 진묵대사에 시에 빗대어 쓴 시다. 전자가 자연에 의지한 삶이라면 후자는 주위 사람과 연연한 삶 속에 이상을 그린다. 맑은 물 한 잔 마시는 일 온몸을 일깨우는 일, 돌고 도는 피의 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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