釜山 =손택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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釜山
=손택수
산과 산 사이에 수평선을 걸어놓았다
솥에 바닷물을 퍼 담아 소금을 굽고 있는 것이다
범일동 부둣가 문현동 지게골을 떠돌았다는 이중섭의 흰소인가 한다 수평선만한 거구와 파도치는 근육들이 들어가 끓고 있는 흰빛, 피골이 상접해서 깨끗이 타오른 뒤 타일 바닥 딛고 뚜두둑 뿔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한다 한여름이면 아비의 이마에 맺혀 서걱이며 돌아오던 저녁 별도 있다 골다공 숭숭 바다를 품던 골판지 집
짜다짜다
몸이 염전이었으니
짜고 짜, 한번 더 쥐어짜 끓는
은지화의 바다다
문학동네시인선 180 손택수 시집 어떤 슬픔은 함께할 수 없다 032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부산釜山’은 지역명이지만, 솥의 범칭으로 일종의 발 없는 솥을 부釜라 한다. 산은 땀과 노력으로 일군 하나의 그릇, 아니 지류로 보인다. 이 시는 화가 이중섭을 보고 느낀 시로 그에 면식이 없는 나로서는 거저 글만 본다. 산과 산 사이에 수평선을 걸어놓았다. 무언가 팽팽한 느낌이다. 삶의 긴장 같은 게 묻어온다. 산과 산을 걸어 놓았으니까. 솥에 바닷물을 퍼 담아 소금을 굽는다. 일종의 삶에 대한 애착과 노력이라고 해야 할까 소금은 하얀 결정체지만 우리 몸에 꼭 필요한 핵심이듯 그것을 굽는 행위는 한 사람의 영혼을 경작하는 행위와 같다. 범일동에서 범일氾溢은 큰물이 흘러넘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문현동에서 예술의 어떤 경지를 넘은 듯한 느낌마저 들며 지게 골에서 한 짐을 얹은 중심 혹은 중추적 어떤 한 결정체를 떠올리게 한다. 거기서 이중섭의 흰 소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는 한 민족을 대표하는 표상이자 세계에 관한 관심을 끌어낸다. 흰 소의 색채에 저 우람한 몸짓에서 물결치는 흰 것의 움직임은 백의민족을 상징했다. 그는 많은 작품을 남기지 못했다. 그나마 있는 것도 말년에 거의 불태워버렸다. 한때 그의 작품으로 위작 논란도 있었는데 모두 그의 아들 소행이었다. 하여튼, 수평선만 한 거구와 파도치는 근육들이 들어가 끓고 있는 흰빛을 그렸다. 거구 큰 몸이지만 큰 입이기도 하다. 근육, 노동을 상징한다. 피골이 상접해서 깨끗이 타오른 뒤 타일 바닥 딛고 뚜두둑 뿔만 남은 것이 아닌가 한다. 이중섭의 말년의 삶을 비췄다. 가난과 허덕이는 그의 삶에서 종이 한 장 구하기 힘든 일이지만 은지화 같은 곳에다가 영혼을 긁어 이룬 작업이었다. 타일에서 바닥에 대한 애착과 분열적 구조를 느낀다. 뿔은 혼(horn)이자 각(角)이다. 마치 구석기 시대에 동물의 뼈를 갖고 동굴 벽에다가 삶을 그린 흔적 같은 것이 흐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담뱃갑에서 얇게 덮은 피 즉, 은지화 한 장에 나뭇조각으로 그림을 그렸던 삶이었다. 한여름이면 아비의 이마에 맺혀 서걱이며 돌아오던 저녁 별도 있다. 아비의 이마, 我比의 移馬처럼 닿는 이유는 읽는 자의 검정이 흰빛으로 가름하여 세상을 보기 위한 행위다. 골다공 숭숭 바다를 품던 골판지 집. 뼈가 약하고 바람 날 듯 숭숭한 바다에서 그런 바닥에서 골판지 집, 물결 모양이 있는 골이 나 있는 종이 포장지에 쓰는 온몸 다 덮어버릴 듯한 저 느낌에서 짜다짜다, 몸이 염전이었다. 거기서 한 번 더 쥐어짜며 끓는 은지화의 바다, 파르르 떠는 저 물결에서 삶을 다시 느껴본다. 은지화가 있다면 나는 골판지에다가 쓴다. 그렇게 세상을 보며 삶을 세우고자 하는 시인의 삶에 대한 애착이 느껴온다.
인터넷 세상, 클릭 한 방이면 하얀 종이가 금시 떠오르고 따그닥따그닥 치는 일은 자위일지언정 도르래 한 방이면 그대로 복사된다. 그것을 가져다 입힌 새로운 장과 그것으로 세상과 소통하는 삶에서 옛적 시인과 화가의 삶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지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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