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반 =황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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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반
=황인찬
나는 천변을 걷는다 천변에는 철쭉이 가득 피었고 나는 저 꽃을 너에게 줄까 생각하다 그만둔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나는 네가 봄볕 아래서 자지러지게 웃던 것을 생각한다 나는 그때가 어디 갔는지 모른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개 한 마리가 이쪽을 쳐다보다 떠나갔다 사람 하나가 이쪽을 여전히 보고 있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나는 하천 가운데 서 있는 새의 이름이 왜가리라는 것을 떠올린다 새는 두 마리 나는 그것을 보고 무엇인가를 은유하려다 그만둔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나는 볕이 간지러워 그러니 물어도 네가 웃기만 하던 것을 생각하다 그만둔다 나는 천변을 걷는다 천변을 따라 봄날이 영원히 이어지고 있다 나는 산책을 그만둔다 이 봄의 반절을 떼어 너에게 주기 위해 “저기요, 거기 들어가시면 안 돼요 빨리 나오세요” 두 마리의 새가 날아간다 은유와는 무관하게
문학동네 시인선 194 황인찬 시집 이걸 내 마음이라고 하자 058p
얼띤 드립 한 잔
시제 ‘봄의 반’ 봄은 보고 있는 상황을 반은 짝이든 되돌리든 아니면 나누는 일이든 시의 내용에 따라 움직인다. 천변은 천변川邊으로 냇가든 천변天邊으로 하늘 가든 어느 것이든 괜찮은 일이나 시 객체의 골목을 서성이는 시 주체의 혼이다. 천변을 걷는 일은 시 객체가 시와의 만남을 통해 여러 가지 상황을 떠올려보는 일, 마치 산책처럼 거니는 것이다. 새는 두 마리가 나오고 새의 이름은 왜가리라 했다. 왜 두 마리일까? 하나는 실체며 다른 하나는 허상이겠다. 혹은 질의와 응답에 정부의 논리를 가늠하는 기준, 그 잣대를 비유한다. 그러나 시는 다만 천변을 걷고 있다. 천변에 대한 묘사는 여러 가지로 나타난다. 철쭉이 피었다든가 웃는다든가 혹은 간지럽다거나 하는 것들로 그러니까 죽은 자의 처세다. 그러한 감정만 있고 그 감정으로 무엇을 썼다거나 때렸다거나 하는 일은 없다. “저기요, 거기 들어가시면 안 돼요 빨리 나오세요” 죽음의 경계다. 봄이 지나면 시에서는 다시 겨울이다. 따뜻한 사랑도 한때다. 봄의 반절을 떼어 너에게 주는 동안만 어쩌면 천변을 거니는 순간일지도 모른다. 은유와는 무관하게 여기서 은유는 은유恩宥로 남에게 은혜를 베풀어 용서하는 것으로 시는 이미 그 역할을 다 한 셈이다. 왜가리, 빙 돌아서 먼 모양의 倭나 비뚤거나 기운歪것, 키가 작거나矮, 예쁠娃 그 무엇이다. 가와 리도 그 이치에 잘 맞는 시어라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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