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서리 =장석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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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서리
=장석남
옛날은 말씀을 첫서리로도 내려놓으신다
간밤엔 청량 하늘에 찬란한 수를 놨던 목소리들을
오랜 창호지 빛으로다 고루고루 말아 사뿐히 펼쳐놓으셨다
언젯적 말씀이신지
아직 철없이 푸르던 것들은 다수굿이 고개 숙였다
이대로 명이 끊어지는 것!
단호한 글자들이
구르는 벚나무 색동 잎사귀에도 곱디곱다
이제 모두 숨들을 삼키고 새 귀를 갖는다
첫서리 온 아침엔 모두 새파란 귀를 갖는다
창비시선 317 장석남 시집 뺨에 서쪽을 빛내다 62p
얼띤 드립 한 잔
구월은 온도 차를 처음 느낄 수 있는 달이 아닐까 한다. 추석을 지내고도 한동안 더위가 수그러들지 않았다. 그 추석이 얼마나 지났다고 아침 기온이 확연히 다름을 본다. 며칠 전에는 친구의 어머니 부고장을 받았다. 환절기 때면 풀들만 시들해지는 게 아니다. 사람도 때가 바뀌면 몸 상태가 급격한 변화를 겪는다. 관절이 안 좋다든지 허리가 예전보다 더 굳었다든지 조금 신경 쓰기라도 하면 눈이 아프다든지 그러므로 나이 들수록 관계를 줄이며 글과 익숙하며 마음을 살피면서 죽음을 준비하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만, 경제적인 문제는 삶을 더욱 복잡하게 한다. 어느 성자는 자처 자연인이라며 깊은 산골에 들어가 움막집을 선택하는 이도 있으니 정말이지 대단한 용기라 할 수 있겠다. 그런 면에서 인생의 첫서리, 언제쯤 올까? 육십오 세쯤 대략 간주해 본다. 그때까지 가는 것도 운이 따르겠지만, 하루하루가 새로운 귀를 파고 돌아누워 아쉬움이 없는 귀에 몰입하는 거로 저 벚나무 잎사귀에 좌정하며 문을 열어놓는다. 귀, 동이족은 예부터 왔던 곳으로 가는 일을 돌아간다고 했다. 생기사귀生寄死歸다. 서애 유성룡 선생께서 쓰신 ‘징비록懲毖錄’에나 볼 수 있는 전쟁도 없었고 조선시대 대기근과 같은 일도 겪지 않았다. 개나 고양이도 집에서 머물며 마사지를 받기까지 참으로 평안한 시대에 우리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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