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명 =조혜은
페이지 정보
작성자
본문
실명
=조혜은
실수로 아름다운 문장을 쓰게 된 것처럼 실수로 빛을 잃게 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실망하지 마 너는 이름을 잃었을 뿐이야, 목숨을 잃었을 뿐이야 그렇게 시력을 잃었을 뿐이야 세상의 일부가 어두워질 때, 네 세상의 모두가 다리를 잃고 네 시선이 머문 내 얼굴에 검은 점이 생기고 개구리알을 닮은 무력한 절망이 모여, 남겨진 삶 위에서 꿈틀대고 눈처럼 아름답게 녹아 사라지는 게 아니라 눈물이 남긴 얼룩처럼 기어코 살아 눈을 떠야 했을 때 앞이 보이지 않아 이대로 볼 수 없는 채 죽으면, 죽어서도 볼 수 없을까 보이지 않을까 살아 있다고 해도 내게 모두 거짓을 말할까 안대를 씌운 사람 취급을 당할까 나는 이름을 잃은 걸까, 빛을 잃은 걸까 진짜 나를 얻은 걸까 너라는 평범한 글자 하나로 울 수 있을까 나는 상처 입지 않아 상처 입지 않아 누구보다 정확한 음계로 계단을 내려가던 너를 기억한다 너는 시력을 잃은 나의 첫 번째 벗이었고 나의 벗이 애달파하던 첫사랑이었고 내가 잃어버린 기억 속에서 시력을 잃은 첫 사람이었다 빛이었다 내가 잃은 처음이자 마지막 빛이었다
민음의 시 300 조혜은 시집 눈 내리는 체육관 30-31p
얼띤 드립 한 잔
아름다운 문장을 쓰면 실명에 이르는 것일까? 그러면 아름다운 문장의 기준은 무엇인가? 경전과 같은 시, 아니면 법전과 같은 문 혹은 일상생활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 생활의 잡담이나 사설은 하여튼 문의 세계는 일반적인 삶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 어떤 글귀라도 남겨진 곳은 꽉 닫은 세계관을 이루며 이름이 있든 없든 사장된 세계에 있으므로 실명이자 그때 그 시점에서 죽은 목숨이다. 그러므로 네 세상의 모든 다리는 없는 것이 되며 여기 머문 이 자리는 검은 점으로 가득하다. 그 점 하나하나가 모두 개구리 알이다. 개처럼 짖거나 비둘기처럼 이상한 구름을 몰며 다스려지는 마을에서 이웃은 한정이 되어 있는 마당, 남겨진 삶이라는 것은 오로지 절대 아름답지가 않은 눈으로 실명 아닌 실명으로 산다는 일 그곳은 피안이다. 그러나 절대 아름답지 않은 세상에서 어쩌다 한 번씩 오는 발은 맹하다. 그러나 그는 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사람이며 첫사랑이었다. 실명을 실명으로 본 그곳이 상처로 닿았던 혹은 약이었던 붕대처럼 감싼 것은 분명한 일이었다. 애달파 울지 마라! 내 기억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오로지 눈처럼 새하얀 눈밭 길에서 두 줄로 나란히 찍은 바퀴 자국만 무수히 나 있었다는 것 외엔 그 어떤 것도 떠오르지 않으니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