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비 / 한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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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비 / 한용국
나뭇잎에서 빗방울 하나가 이마에 떨어졌다
그 순간 내 이마를 휘돌아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헤엄쳐 가는
물고기의 은빛 꼬리를 본 것도 같았다
나는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를 알고 있다
물방울들이 벼랑에 얼음조각처럼 맺혀 있었다
쌀알에 불경을 새긴다는 승려도 알고 있다
반야심경을 쌀 한 톨에다 새겨 넣는다고 했다
맨 눈으로는 못보고 마음의 돋보기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막 이마를 때리고 지나간 물방울 속으로
밤의 벼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으로
팔만 사천 경전을 새겨놓은 승려의 한 톨 심장 속으로
물고기는 은빛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갔을 것이다
나뭇잎들이 저마다 빗소리에 솨아솨아 귀를 열기 시작하고
내 눈 속에 먹을 잔뜩 머금은 한지 한 쪽이 젖어내리고
있었다
* 한용국 : 2008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
나뭇잎에서 빗방울 하나가 이마에 떨어졌다
그 순간 내 이마를 휘돌아
까마득한 어둠 속으로 헤엄쳐 가는
물고기의 은빛 꼬리를 본 것도 같았다
나는 물방울을 그리는 화가를 알고 있다
물방울들이 벼랑에 얼음조각처럼 맺혀 있었다
쌀알에 불경을 새긴다는 승려도 알고 있다
반야심경을 쌀 한 톨에다 새겨 넣는다고 했다
맨 눈으로는 못보고 마음의 돋보기를 얻어야 한다고 했다
지금 막 이마를 때리고 지나간 물방울 속으로
밤의 벼랑에서 미끄러져 내리는 한 방울의 눈물 속으로
팔만 사천 경전을 새겨놓은 승려의 한 톨 심장 속으로
물고기는 은빛 꼬리를 흔들며 헤엄쳐 갔을 것이다
나뭇잎들이 저마다 빗소리에 솨아솨아 귀를 열기 시작하고
내 눈 속에 먹을 잔뜩 머금은 한지 한 쪽이 젖어내리고
있었다
* 한용국 : 2008년 <문학사상> 으로 등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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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시앙보르님의 댓글

수도승의 성찰을 '한 방울' 사리로 압축한 시편을 올려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내용을 휘어잡은 '밤비' 제목 또한 '방울'처럼 보태고 뺄 게 없다는 생각입니다.
라틴어 구약성서 중 솔로몬의 시편 한쪽을 밀알 하나에 새겼다는 수도승이 떠오릅니다.
정진은 모름지기 공통분모라는 사실에서 숙연해집니다.
湖巖님의 댓글

그렇습니다
한방울의 물방울에 팔만 사천 경전을 새겨 넣는 승려나
솔로몬 시편 한쪽을 밀알에 새겼다는수도승이나
정진은 모름지기 아름답고 숙연합나다
시앙보르님 들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