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에 와 생각합니다 바위가 山門을 여는 여기 언젠가 당신이 왔던 건 아닐까 하고, 머루 한 가지 꺾어 물 위로 무심히 띄워보내며 붉게 물드는 계곡을 바라보지 않았을까 하고 잎을 깨치고 내려오는 저 햇살 당신 어깨에도 내렸으리라고
산기슭에 걸터앉아 피웠을 담배연기 저 떠도는 구름이 되었으리라고, 새삼 골짜기에 싸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벗하여 살 이름
머루나 다래, 물든 잎사귀와 물, 山門을 열고 제 몸을 여는 바위, 도토리, 청설모, 쑥부쟁이 뿐이어서 당신이름 뿐이어서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줄 당신이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연세대 국문과와 동대학원 박사과정을 졸업했다.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뿌리에게」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시집으로『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시론집『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산문집『반통의 물』 등이 있다. 김수영문학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현대문학상, 이산문학상, 소월시문학상 등을 수상했으며 현재 조선대 문예창작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다.
시를 읽으니...
문득, 졸시 한 편도 떠올라 감상을 代하여 옮겨봅니다.
- 희선,
편지 - 단풍이 우거진, 오솔길에서
단풍이 타오르는 호젓한 길 주변(周邊)에 차가운 시냇물의 향기가 그윽한 날에는 각혈(咯血)하는 산들의 신음을 들으며 숲으로 길게 드리운 오솔길을 거닌다
흘러간 세월 위에 잘못 붙여진 나의 헛된 장식(裝飾)을 무리지어 흐르는 가벼운 구름에 실려 보내고, 낯선 미지(未知)의 풍경에 벌거벗은 몸으로 숱한 햇빛 속에 메마른 가슴을 드러내면 오래 전에 놓여진 삶의 함정들은 이젠, 더 이상 눈익은 쐐기가 될 수 없어 저 멀리 어두운 언덕을 따라 뒷걸음 친다
숲에 깃드는 새로운 침묵은 맑은 목소리로 깊어가는 계절을 알려주고 나는 짐짓, 삶의 마지막 감동으로나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함초롬히 끌어안고 새로이 시작하는 순박한 언어(言語)로 너에게 편지를 쓰려한다
사색은 잠시 미정(未定)인 양, 홀로 자유로워 고요에 고요를 덧보태는 시간 속에서 그리움으로 반짝이는 빈 줄과 공백으로 가득 가득 채워진 나의 가장 긴 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