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에서 /곽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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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북수유리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홈페이지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댓글 0건 조회 1,331회 작성일 17-12-07 09:54본문
사평역에서
곽재구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시린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줌의 눈물을 불꽃 속에 던져 주었다.
―시집『사평역에서』 (창비, 1983)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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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평역이 어디일까. 강원도 산골 어디쯤에 있는 역일까. 아니면 경상도나 전라도 어느 변방에 있는 역일까. 등장인물과 역 내부의 모습으로 보면 시골 소읍에 있는 작은 역 정도로 보인다. 그러나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역이라고 한다. 그런데 시 속에 화자는 어떤 연유로 이 작은 역에 갇혀 있게 된 것일까. 사업이 부도나 인생의 의미를 잃고 목적도 없이 떠돌다 잠시 머무르게 된 것일까. 아니면 이 시가 쓰여 진 80년대 민주화 운동을 하다 경찰에 쫓겨 연고지도 없는 광산촌으로 오지의 산골로 숨어들었던 운동권 학생들이 있었다. 화자도 그 중의 한 명은 아니었을까.
이 시를 바탕으로 쓴 임철우 소설에는 화자가 운동권 학생으로 나온다.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 쓰여 진 시여서 그런 설정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 시를 일제 시대 쓰여 진 한용운 시인의 ‘님의 침묵’이나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처럼 확대 해석하여 시대적 함의로 읽는다면 소시민적 삶의 향기가 오롯이 담겨 있는 이 시의 의미는 퇴색이 되고 시 읽는 재미는 반감될는지도 모른다.
- 낭송 단이 / 권영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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